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만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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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중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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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삶에 몇 번의 절망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어머님의 자살시도와 부모님의 이혼, 승선하다가 군 입대영장이 나왔을 때, 부산에서 교육전도사 하다 남에게 말하지 못한 아픔들이다. 당시에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많은 눈물도 흘렸고, 답답한 마음에 깊은 좌절과 고통의 시간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암담하게 보였던 시간들은 제 삶에 균형과 하나님을 경험하는 시간으로 제게는 돈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 그대들의 인생속에서도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난적은 없습니까? 살아 계시다고 하시는 하나님은 전혀 보이지 않고, 꼬여도 계속해서 꼬이는 상황을 직면 한적은 없습니까? 그러한 시기에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하겠습니까? 그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에스더입니다.

모세와 에스더사이에는 많은 유사성이 있습니다. 둘 다 이스라엘민족을 이방민족으로부터 해방한다는 것, 모세는 바로의 왕자가 되고 에스더는 페르샤의 왕 아하수에로의 왕비가 된다는 것, 자신이 유다인임을 상당기간 동안 숨기고 산다는 것,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위해 왕과 여러 번의 만남을 갖게 된다는 것, 그들에 의해 각각 유월절과 부림절이라는 축제가 생기게 된다는 것들이 공통점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점은 한 민족을 구원하는 것은 남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얼마든지 여성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음을 잊지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전에 한번 말씀드렸지만, 성경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한번도 나오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에스더 속에서는 모세의 시대와 같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모세때에는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직접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기도 했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돌비에 십계명을 새겨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에스더에는 그러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의 모습이 보이질 않습니다. 에스더서의 하나님은 철저히 감추어져있는 하나님입니다.

어쩌면 에스더에 나오는 정황은 우리의 시대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직접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눈에 보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삶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게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에스더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다면 우리의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꿈을 함께 꿀 수 있게 될 것이다.

에스더서는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왕 시대에 유대백성들은 이미 포로로 잡혀와서 생활하고 있었던 때의 일입니다. 페르시야가 전 세계를 다스릴 정도로 화려한 부흥을 경험하던 시기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가 127도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아무튼지 그는 왕후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후 에스더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이스라엘사람입니다. 에스더의 이름의 뜻은 별이라는 바사어다.

그런데 문제는 아하수에로왕이 하만이라는 사람을 높이 등용하고부터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하만에게 절을 하는데 모르드개만 하지 않았습니다. 주위에서 아무리 권해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궐문을 지나다니면서 항상 모르드개가 절하지 않는 것을 보며 기분이 상한 하만은 이것 때문에 모르드개만이 아니라 그가 속한 유다민족까지 멸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하수에로왕에게 못된 민족이라고 참소하여 12월 13일이라는 날짜를 정해 그날 유다인들을 죽이고 재산을 탈취할 수 있게 칙령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파멸될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이런 위기를 모면하도록 에스더에게 사람을 보내 왕에게 청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법에는 왕이 부르지 않고 왕에게 나아가는 것은 금지되어있었습니다. 당시엔 왕을 모살하려는 사람이 많았기에 왕이 부르지 않고 나오는 것은 그런 반역의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에스더는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갔다가 죽임을 당할까봐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르드개의 강한 권고를 받고 왕에게 갑니다. 이때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수산성에 있는 온 유다인들이 3일간 금식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도 시녀들과 함께 3일 금식하고 왕에게로 가겠다고 합니다.

어려움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기를 표면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받을만한 것이 하나도 없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속에서 하나님은 철저하게 숨어계신 하나님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보게됩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를 보십시오. 에스더가 그때 왕비가 된 것이 기적이 아닙니까?
에스더가 왕 앞으로 나아간즉 왕이 금홀을 그에게 내어밀었습니다. 내어밀지 않으면 에스더도 죽고 그 백성도 전멸할 수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왕이 밤에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왕이 잠이 오지 않으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왕은 신하를 시켜서 역대일기를 가져오게 합니다. 왕이 그 밤에 역대일기를 보다가 모르드개의 충성을 알게 됩니다.

우리에게 우연처럼 보이는 수없이 많은 일들이 하나님의 시야에서는 모든 것이 다 예정된 일임을 알아야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우연이라고 해석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에게는 필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인생의 모든 일들을 해석할 때,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그져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넘길 때가 있습니다. 이 집안에 태어난 것, 이 시대에 이 직업을 가진 것, 교회에 다닌 것,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 그 남자와/ 그 여자와 결혼하여 전혀 모르는 가족의 구성원이 된 것 등 그 모두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오묘하고 섬세한 섭리가 숨어있는 것이다.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어부였습니다. 평생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난 날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밤새워 그물을 던졌는데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 우연처럼 일어난 일들 속에서 주님의 말 한마디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단 한번에 두 배가 잠기게 고기를 잡게 됩니다.

또 예수님께서 부활하심 때에도 비슷한 일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음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부활하심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갈릴리로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그 밤에 그는 또 한번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주님께서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 하시자. 153마리의 고기를 잡게 됩니다.

우리에게 우연처럼 다가오는 실패도 있습니다. 도저히 말도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한 일도 있습니다. 그러한 일이 우연의 일치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나를 향하신 숨어계신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우연이라고 말한다. 아닙니다. 우리는 필연적 존재입니다. 우연적 존재에게서 목적의식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삶속에, 나에게 부닥치는 모든 일들 속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필연이라면 우리는 우리에게 생겨난 일들을 무심코 스쳐 지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이고 필연이라면 나의 삶은 어떠해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있기 전에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시켜 왕 앞에 나아가라고 권합니다. 그러면서 말하는 내용이 에스더4장 14절입니다.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대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에스더가 왕후가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모르드개는 말합니다. 바로 너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고백으로 왕에게 나아갑니다.

에스더는 하나님의 때를 발견하고 그 시대에 자신의 할일을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안에서 소명으로까지 발전하여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그 주인공이 되어야합니다. 그 안에 뛰어들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행동을 통하여 내가 그 사건에 직접 뛰어들지 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구체화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응답의 절실함도 없는 것이다.

역사의 배후에 숨어계시게 보이는 하나님이 바로 나의 결단과 행동속에서 나타나 민족을 구원하고 시대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4:16,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용기있는 인간이 없었더라면, 그 하나님의 숨은 역사는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대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인지 누가 아느냐.” 네가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그 사람이 바로 나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 앉아있는 형제님 자매님 이십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바로 나를 통해, 너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우연인 것처럼 보이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행복했던 불행했던 많은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떠 올릴 수 있습니다. 결국 그러한 일들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이며, 인도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서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숨어계시게 보이는 상황입니까? 하나님의 도움은커녕 계속해서 문제가 꼬이고 있습니까? 그 자리에 계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우리는 숨어계신 하나님의 앞에서 그러한 역경과 환경속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하는 것입니다. 그 환경속에 나를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용기있게 그 환경속에서 믿음으로 결단하며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일로 부림절이 생겼습니다. 부림절은 부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부르는 주사위(제비)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주사위는 우연성의 극치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민족은 그것의 결정자가 하나님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잠언 16:33-“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하나님께 있느니라”

내 인생의 주인은 운명이 아닙니다. 운도 아니고 우연도 아닙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만이 존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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