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을 사랑합시다.

작성자 정보

  • 김중곤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이웃을 사랑합시다. 누가복음10장 25-37

서로 인사 나누겠습니다. 주님안에서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주안에서 사랑합니다.
계명중에 가장 커다란 계명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이웃은 누구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이웃이 있습니까? 예전 우리 대중가요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그러길래 이웃을 사촌이라고 했죠. 멀리 있는 친척도 사촌만은 못해요"
이 가사가 맞습니까? 한편은 맞고 한편은 틀렸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가까이에 있다고 이웃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가장 가까이에 살면서도 원수인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웃과의 사랑의 문제가 영생의 문제(천국가는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십계명의 요약이며, 성경전체의 요약이기 때문입니다. 한 율법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냐고 질문을 합니다." 사실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웃 사랑에 대하여 평생 들었으면서도 이웃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어떻게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있어서 이웃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잘 알다시피 본문의 내용은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납니다. 강도들은 이 사람의 옷을 벗기고는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가 버렸습니다. 사실 당시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 27km구간에는 자주 강도가 출현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몹시 조심스럽게 이곳을 통과해야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제사장과 레위인도 여리고로 가게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두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내버려두었습니다.
반대로 두 사람이 지나간 후에 사마리아 사람이 와서는 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돕습니다. 사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에게 개 취급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주전 722년에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하였을 때, 앗수르는 이민정책을 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서, 이방인과 살게 되었고, 또한 이방인들이 많이 이스라엘 땅으로 이주해와서 섞여서 살게되면서 그들은 혈통적으로 순수성 잃어버리게 됩니다. 또한 앗수르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왔을 때는 이방신을 가지고 들어왔기에 종교의 순수성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혈통과 순수성을 잃어버려서 사람취급도 받지 않았던 사마리아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치료합니다.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보십시오.
33절 보고 불쌍히 여기고, 34절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려갔다고 자세히 기록합니다. 이웃사랑에 대해서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더 많이 배웠고,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지 않았고 사마리아인은 적게 알고도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알고있다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많이 배운 만큼 실천하면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많이 배운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우리는 대개 사랑을 실천한다고 하면 내가 아는 사람,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 나에게 유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나와 격이 맞는 사람에게 행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반면에 나에게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마리아 사람을 보십시오. 그가 오늘 만나서 사랑을 실천하는 강도 만난 사람은 그가 전에 알고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 그에게 어떤 보답을 기대한 것도 아닙니다. 나에게 유익이 있다는 판단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의 사랑은 아무런 조건이 없어 보입니다. 이것은 우리 이웃 사랑의 대상은 정해서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누구라도 사랑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와주되 조건을 따지지 않은 사랑, 나의 유익을 계산하지 않는 사랑, 값없는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벽이슬같은 청년들이여! 그대에게는 이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웃은 누구입니까? 엄밀히 말해서 이웃은 정의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면 그 사람은 나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아무리 많은 논리와 학위를 갖고 있다고 해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아무리 잘 외운다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내가 내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나의 도움이 손길이 닿을 때 이웃이 생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웃 사랑을 얼마나 하여야 합니까? 즉 이웃사랑의 한계가 어디까지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사마리아인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여관에까지 데려간 것으로 그의 사랑을 끝내고 있지 않았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와서 갚겠다고 합니다. 즉 이웃사랑은 끝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회복될 때까지입니다. 그렇기에 이웃사랑이 쉽지 않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이웃 사랑은 - 그 사람이 잘 될 때까지 하여야한다. 우리청년공동체에 적용해볼까요? 지금 우리예배에 참석한 사람이 다 이웃이라고 한다면 이웃사랑은 예배에 참석한 모든 사람을 서로가 알고 이해하고 기도해줄 수 있을 때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만일 하나님 사랑을 아무리 잘하고 기도 잘하고, 매일 철야하며, 헌금을 잘한다 할지라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잘못 믿거나, 신앙이 잘못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한다면 영생이 얻지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율법교사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7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행하십시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25 / 3 Page
번호
제목
이름

성경공부


최근글


새댓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