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과 참 신자는 죄와 율법 아래 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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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덕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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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는 성경에서 가장 복음을 강력하게 선포하는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갈라디아서가 이런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은 갈라디아교회에 거짓교사들이 들어와 거짓복음으로 성도들을 미혹했기 때문이다. 거짓교사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복음이 아니라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자기의 업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주의였다. 이것은 불신이며 만일 성도들이 여기에 미혹되면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율법주의를 공격하며 참 복음을 강력하게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갈라디아교회에는 이런 율법주의의 문제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모든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조하며 죄는 다 용서받으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방탕주의의 문제도 있었다. 원래 이들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여 영혼은 선하지만 육체는 악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영혼은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육체는 어차피 악한데다가 영혼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니까 육체는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삶은 오히려 방탕하게 사는 방탕주의자가 된 것이다.

그러면 갈라디아교회에 율법주의자들이 따로 있고 방탕주의자들이 따로 있었을까?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과 방탕주의자들이 같은 사람들일 수도 있다.(유대적영지주의, 많은 사람이 인정한다는 증거로 명칭 기록) 오늘은 이런 자들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율법주의자가 율법을 어기며 방탕하게 살아도 된다고 하는 방탕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율법주의자로 지키려고 하는 율법과 방탕주의자로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율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다를까? 갈라디아교회의 율법주의자들은 할례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종교의식법이다. 방탕주의자들은 자기의 정욕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도덕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교의식법에 대해서는 율법주의자가 되고 도덕법에 대해서는 방탕주의자가 되면 이들처럼 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교회에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면서도 세상에서 정욕대로 악하게 사는 것은 전혀 문제 삼지 않는 것이다.

우리 중에도 이런 모습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주일예배에만 잘 참석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지만 세상에서 죄를 짓는 것은 다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받으니 세상에서는 쉽게 죄를 짓는 것이 이런 모습이다. 이런 사람은 종교의식법을 지킴으로써 죄용서와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종교의식법의 율법주의자이다. 그러나 종요의식법으로 죄를 용서 받았으므로 세상에서 얼마든지 죄를 지어도 부담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성실한 신자가 되고 세상에서는 악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교회에 열심히 나올수록 세상에서는 더 마음 편하게 죄를 짓게 되기도 한다.(뇌물?)

사실 우리 주위에도 교회에는 열심히 나가지만 세상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죄를 짓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모습이 바로 갈라디아교회의 거짓교사들에게 미혹된 성도들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오늘의 우리들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워하며 얼마나 분개하며 강력하게 복음을 전하고 참 신자의 삶을 가르쳐주겠는가?

그러면 이렇게 율법주의와 방탕주의의 결합이 모습이 의식법을 지키고 도덕법을 어기는 것으로만 나타날까? 그렇지 않다. 성도들 중에는 도덕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의식법을 무시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바르게 살고 선행을 많이 하면 되지 꼭 교회에 나와 예배드려야 하느냐고 하며 교회생활을 무시한다. 이것도 모습만 다르게 나타났을 뿐이지 똑 같이 율법주의와 방탕주의가 합쳐진 모습이다. 이때는 도덕법을 잘 지켜 구원을 받으려는 율법주의와 예배와 경건의 시간은 자기의 정욕을 위해 함부로 무시하는 방탕주의가 함께 나타난 것일 뿐이다.

우리가 정말 성령님의 인도 속에 예수님을 바로 믿으면 우리는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난다. 율법의 강박감에서도 해방된다. 율법주의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다. 아울러 죄 씻음을 받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특히 성령님의 역사로 육체의 소욕을 이겨내기 때문에 정말 남달리 바른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서 성령님을 따르는 참 신자는 죄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진정한 기쁨과 자유 속에 바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도덕법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과 무관한 도덕법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배운 바른 삶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의식법과 도덕법을 다 지켜야 한다. 그러면 종교의식법과 도덕법 중 어느 게 더 중요할까? 중요도를 따지만 도덕법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시간적으로 먼저 지키기 시작해야 할 것은 종교의식법이다.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삶을 고치지 못해도 교회에 나와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 것과 같다. 또 교회에 나와야 바른 삶에 대해 배우고 바르게 살 수 있는 힘도 얻는다. 그래서 시간적인 순서로는 종교의식법을 먼저 지켜야 하고 중요도에 있어서는 도덕법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이 이것을 가르쳐준다.

토의문제

1. 내가 꼭 지키려고 애쓰는 종교의식법을 구체적으로 몇 가지 말씀해주십시오.(주일예배, 새벽기도회, 구역예배, 아침 QT, 교회의 특정 사업 참가, 등)
2. 내가 꼭 지키려고 하는 도덕법을 구체적으로 몇 가지 말씀해주십시오.(정직한 삶, 등)
3. 나는 교회생활과 사회생활 중 어느 곳에서 더 신자답게 행동하려고 노력합니까?
4. 나는 종교의식법을 잘 지킬 때와 도덕법을 잘 지킬 때 중 언제 주님의 은혜를 더 많이 느낍니까?
5. 우리가 율법주의와 방탕주의를 함께 가진 사람이 되지 않고 참 신자의 삶을 살도록, 교회의 부흥을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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