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과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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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덕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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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움직일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은 당근과 채찍이다. 당근은 유익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는 것이고 채찍은 고통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유익을 주지 않고 기대감만 주거나 고통을 주지 않고 두려움만 줘도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사기꾼) 이렇게 두려움은 사람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사람은 무엇을 두려워하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가난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돈을 벌 수 있을 때 정직을 잃는 게 더 두려우면 거짓말을 안 할 것이고 배고픈 게 더 두려워하면 거짓말을 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아주 지혜롭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면 누구를 두려워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일까? 하나님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반대로 누구를 두려워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일까?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오늘 본문은 바울이 베드로를 꾸짖은 사건이다. 이것은 교회조직으로 본다면 총회장이 선교지에 갔다가 선교사에게 꾸중을 들은 것과 비슷하다. 물론 재정적으로는 다르다. 바울과 이방인 교회가 베드로와 유대인 교회의 재정지원을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의 모습으로는 분명히 특별한 사건이다. 이것은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1. 바울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도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바울은 베드로도 꾸짖을 정도로 올바른 판단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이것을 통해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인정하고 그가 전하는 복음을 존중하게 하려는 것이다.

2. 복음의 진리를 가르쳐준다. 사람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다가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자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이것은 유대인이 이방인보다 더 거룩하다고 믿은 유대인의 전통을 따른 행동이다. 이 행동을 보면 예수님 안에서도 유대인이 이방인보다 더 거룩한 것 같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을 무시하는 행동이며 결국 복음의 진리를 왜곡하는 행동이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를 꾸짖은 것이다. 이 사건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다시 한번 확실히 가르쳐준다.

3. 바른 신앙생활을 가르쳐준다. 참 신자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전하는 진리는 두려워해야 하지만 사람의 외모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변호사의 관록이 아니라 변호사의 증거를 두려워해야 하는 것과 같다. 세상에서는 사람의 외모가 영향을 미치므로 외모를 두려워하는 게 지혜처럼 보인다.(권력자 따라 줄서기) 그러나 하나님(진리) 앞에서는 외모가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세상 지혜와 달리 진리만 따름)

4. 지도자의 바른 자세를 가르쳐준다. 지도자의 행동은 말보다 더 강한 가르침이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므로 복음 안에서는 모두 같다고 말하며 자신이 솔선수범해서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했다.(행 11장) 그런데 지금은 이방인과 식사하면 안 되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것은 이방인에게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안 되니 할례를 받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갈라디아에 온 거짓교사들의 가르침과 얼마나 비슷한가?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꾸짖는 것이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갈 2:14) 지도자는 행동이 설교라는 것을 기억하고 행동에 조심해야 한다.

베드로는 어떻게 이런 실수를 하게 되었을까? 베드로는 예수님이 죄인들과 식사하신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제는 자신이 이방인과 식사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행 10장의 환상) 베드로는 유대인 성도들 중에 처음으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며칠 머물며 함께 식사한 사람이고(고넬료의 집) 이것이 옳다고 유대인 신자들에게 가르쳐준 사람이다.(행 11장) 그런데 여기서는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

1) 야고보측 사람들과 화평을 지키기 위해인가? 그렇다면 진리와 사랑을 함께 지키는 데 실패한 것이다. 화평을 위해 진리에 큰 손상을 입힌 것이다.
2) 아마도 교회의 화평을 위한 순수한 마음보다 야고보측의 영향력과 그들의 비난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을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 얼떨결에 이런 실수를 한 것 같다. 베드로가 전에 예수님을 부인한 것도 얼떨결에 그랬을 것이다. 이것은 그 모습과 비슷하다.
3) 더욱이 바나바마저 이런 잘못에 빠졌다. 바나바도 베드로와 비슷한 이유였거나 혹은 분위기에 휘말려서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진리를 알고 성령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았던 사람도 이런 실수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유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진리가 몸에 배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얼떨결에 행동하면 오히려 더 바른 행동이 나오도록 바른 삶이 몸에 배는 것이다.(주기도를 생각 없이 하면 안 틀리는데 생각하면 틀린다?)

토의문제

1. 내가 두려워하는 사람을 세 분 말씀해주십시오. 이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2. 얼떨결에 혹은 분위기에 휘말려 실수했는데 나중에 그것이 큰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고 후회한 적이 있습니까?
3. 성도들이나 교회지도자들의 행동을 보고 감동을 받은 경우와 실망한 경우를 말씀해주십시오.
4. 형식을 무시해도 복음이 오해될 수 있고(방탕주의) 형식을 강조해도 복음이 오해될 수 있습니다.(율법주의) 이 두 경우의 구체적인 예를 찾아보십시오.
5.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따르도록,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 전도대상자들을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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