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과 바울의 회당 설교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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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덕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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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울과 바나바가 구브로섬의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로 갔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해설: 요한(마가)이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마가가 어디서부터 바울과 바나바와 같이 선교여행을 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것과 바나바의 사촌 혹은 생질(골 4:10를 보면 한글개역성경에 생질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사촌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마가는 예루살렘에 있다가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사역할 때 안디옥으로 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에서 선교여행을 떠날 때 따라 간 것 같습니다. 혹은 구브로섬에서 만났다고 볼 수도 있으나 마가의 집이 예루살렘이라는 점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갔으므로 전자가 더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2) 마가의 행동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사도행전 15:38을 참고하십시오.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행 15:36-38)

해설: 마가의 행동은 바울에 의해 옳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마가는 정당하지 못한 이유로 선교여행을 중단한 것 같습니다. 마가의 행동은 잘못된 행동입니다. 그가 떠난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선교여행에 어려움이 있어서 그런 것일 것입니다. 그 어려움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육체적인 어려움과 정신적인 어려움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어려움은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 장거리 여행을 하며 선교한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입니다. 더욱이 환영하는 사람도 없는 곳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어려운 일입니다. 정신적인 어려움으로서는 바울이 앞장서서 활동하는 것이 바나바의 친척으로서 불쾌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혹은 바울의 적극적인 이방인 선교를 탐탁지 않게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추측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어려움이 있었다 하더라도 마가는 끝까지 선교여행에 동참하여 신실하게 사역했어야 합니다. 그가 이렇게 하지 못한 것은 그의 연약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으로 갔는데 이 안디옥은 어디에 있는 안디옥입니까? 이곳은 바울과 바나바가 파송받은 안디옥과 어떻게 다릅니까?

해설: 지금 바울과 바나바가 간 안디옥은 비시디아 지방의 안디옥으로서 이들이 파송되었던 수리아의 안디옥과 전혀 다른 도시입니다.

4)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어디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까?

해설: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5)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해설: 바울은 자기 동족을 사랑했습니다. 유대인을 제쳐놓고 이방인에게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회당에서 복음을 전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회당이 복음을 전하기 좋은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으므로 메시야를 소개하기가 좋고 또한 구약성경을 알고 있으므로 구약을 들어 설명하기가 좋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회당은 손님이 오면 말씀을 전할 기회를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다는 것도 좋은 조건입니다.

6) 바울의 설교는 베드로가 한 설교가 비슷합니다. 여기서 어떤 점을 느끼십니까?

해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꼭 새로운 설교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노력하지 않고 구태의연하게 말씀을 전해도 안 되지만 사람의 귀를 인식하여 새로운 것을 말하려는 데 지나치게 신경을 쓸 필요도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복음이 청중에 맞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청중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바울은 유대인의 관심사와 지식에 맞춰 복음을 전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던 베드로의 설교와 비슷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게 되듯이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이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는 전혀 다른 접근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7) 바울의 설교에서 특별히 강조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해설: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라는 것과 예수님은 고난과 부활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빼면 복음이 아닙니다. 다른 말만 하고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지 않으면 복음이 제대로 전파되지 않습니다. 현대의 교회 중에는 이 부분을 약화시키는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우리는 복음의 핵심을 분명히 믿고 또한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8) 베드로는 그 설교에서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몰라서 죽였고 하나님의 예정대로 죽였다고 함으로써 청중의 부담을 덜어주고 회개할 기회를 주었습니다(행 3:17-18). 바울의 설교에도 이런 모습이 있습니까?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 3:17-18)

해설: 바울도 유대인들이 몰라서 그랬다고 하여 심하게 정죄하지 않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을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이라고 함으로써 지금 청중(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의 부담을 덜어줍니다. 그리하여 청중이 설교를 잘 받아들이도록 돕습니다.

9) 설교는 어떤 내용으로 마무리됩니까?

해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하는 위협으로 마무리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안 믿어도 괜찮은데 믿으면 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안 믿으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파멸을 맞이하게 됩니다. 꼭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알려주기 위해 복음에는 기본적으로 위협의 내용이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말할 필요가 없을 수는 있어도 위협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교하러 보내실 때도 주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0:14-15를 참고하십시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0:14-15)

11)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중단한 적이 없습니까? 왜 중단했습니까? 다음에 그 일을 계속하여 완수했습니까?

해설: 신실한 일꾼은 자기의 형편에 따라 하던 일을 중단하지 않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려움이 있더라도 신실하게 꾸준히 사역하여야 합니다.

12) 우리의 교회에서 전파되는 복음에는 바울이 전한 것 같은 내용과 원칙이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 원칙은, 예수님이 구주라는 것,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강조하는 것, 듣는 사람의 경험이나 지식에 맞게 전하는 것, 예수를 꼭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듣는 사람이 지나치게 죄책감이나 반발을 하지 않도록 지혜롭게 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교회가 복음을 지혜롭고 능력 있게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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