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과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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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덕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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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문: 신자가 부활할 때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답: 신자가 부활할 때 영광 중에 다시 살아남을 입어, 심판 날에 밝히 인정됨과 죄 없다 하심을 받고, 완전히 복을 받아 영원토록 하나님을 흡족하게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요 5:28-29; 마 10:32; 25:23; 살전 4:17; 요일 3:2; 고전 13:12)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3)


1. 부활에 대한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면서도 많은 오해가 있었고 또한 불신자들의 여러 가지 공격을 받아왔습니다. 우선 우리는 부활과 영생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양식인 삼위일체를 다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다만 성경이 가르쳐주는 몇 가지 모습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부활이 이루어지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믿기 때문에 어떤 과정을 겪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부활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


2. 그러면 부활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선 알아야 할 것은 부활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엘리야에게 음식을 제공한 사르밧 과부의 아들, 엘리사를 대접한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신약성경에도 예수님이 소녀, 청년, 나사로를 살리셨고, 베드로와 바울도 다비다와 유두고를 각각 살렸습니다. 이렇게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부활한 겁니까? 아닙니다. 왜 아닙니까? 이들은 다시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다시 살아났지만 죄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고 영광스러워진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것은 부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영생에 대해서도 명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영생은 죽지 않고 끝없이 사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죽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도 지금 우리의 모습으로 산다면 참 행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죄송한 표현이지만 이런 사람에게는 이 모습으로 끝없이 사는 게 저주입니다. 사실은 이런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 상태로의 끝없는 삶은 저주입니다. 죄와 고통과 불안을 안고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지금 우리가 사는 삶을 끝없이 연장시키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삶의 차원이 달라지지 않으면 영생이 아닙니다. 인간복제로 영생을 누리겠다는 라엘리언의 생각은 원래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이 점에서도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3. 부활은 지금 이 몸과는 다른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37-38은 부활에 대해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그리고 42-44절에서는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이 말씀은 부활에 대해 중요한 몇 가지를 가르쳐줍니다. 우선 부활은 사람의 정체성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밀알마다 각각 싹이 나서 밀이 됩니다. 밀알과 나중의 밀이 서로 뒤바뀌는 일은 없습니다. 이 사실은 이 비유에서만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 각자가 부활하여 영생을 얻는다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다만 이 모습을 보다 쉽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전혀 다른 영광과 능력을 가진 존재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밀알이 썩으면 밀알이 나오지 않고 밀(식물)이 나옵니다. 전혀 다른 기능을 가진 것으로 다시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전혀 다른 영광과 능력을 가진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새로운 형체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전 15:37-38) 그렇다고 우리를 처음 창조하실 때처럼 무에서 창조하시는 것은 아니고 우리의 지금 몸과 정체성을 가지고 부활의 몸을 가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4.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구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도 부활하지 않으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며 구원해주는 것이 못 됩니다. 더욱이 부활이 바로 사람이 구원받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구원도 없고 우리의 믿음도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손해가 됩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6-19)


5. 진정한 부활은 이렇게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도 다시 살아 영원한 고통을 받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이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심판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이 하시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여기서 행한 것에 따라 받는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로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 행함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후자는 참 믿음은 행함이 있기 때문에 행함을 보고 참 믿음이었는지 확인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늘 주님의 믿고 의지하는 믿음의 삶을 산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를 믿고 자기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버림을 당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예수님을 몰라서 믿지 않은 사람,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도 거부한 사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가 의를 세워 구원을 얻으려고 한 사람은 다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을 실천하지 않은 사람도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약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게 아니라 참 믿음이 아니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약해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과 참 믿음이 아니어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다릅니까? 실천하려고 노력하며 실천하지 못했을 때 마음 아파하고 회개하며 더욱 실천하려고 결단하는 것은 믿음이 약해서 실천하지 못한 것이고 실천할 뜻도 없고 실천하지 못한 것을 마음 아파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니어서 실천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문답에서 “밝히 인정됨”은 그 믿음과 하나님의 자녀됨이 인정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6. 부활 후에 상이 서로 다르면 어떤 느낌을 가질까요? 부활 후에는 온전해지기 때문에 완전한 사랑의 삶을 삽니다. 경쟁과 시기가 없고 실망도 없습니다. 모두가 함께 기뻐하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 속에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지내게 됩니다. 다만 부활 후에 상이 작은 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성실히 섬기지 못했다는 뜻이므로 그것이 마음 아프고 송구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그러나 천국은 슬픔과 고통이 없는 곳이므로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사람도 곧 감사와 기쁨과 만족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의 기쁨과 상을 위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게 옳습니다.


이 말씀에서 유의할 것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부끄러운 구원을 얻는다는 게 아닙니다. 참 신앙으로 살아야 구원을 얻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위한 사역의 업적이 부족하여 보잘것없을 경우 부끄러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목사가 바른 신앙생활을 했지만 목회사역에 부족한 점이 많아 목회한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그 업적이 마치 짚으로 지은 집과 같아서 집은 다 불타버리고 자기만 겨우 구원받는 모습이 된다는 뜻입니다.


7. 재림 때는 사람들이 심판을 받아 영생과 영벌로 들어가게 되고 아울러 세상이 변화되어 새로운 세상이 됩니다. 사람만 새로워지는 게 아니라 온 세상이 새로워집니다. 지금 세상은 사라져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집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토의문제


1. ‘내’가 생각하는 부활한 몸의 이상형을 한번 말씀해주십시오. 여기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다만 부활의 영광을 실감나게 느껴보려는 것입니다.


2. 지금 주님이 ‘나’를 부르신다면 주님 앞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 3 가지와 가장 부끄럽게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 3 가지를 말씀해주십시오.


3. ‘나’는 누구의 죽음을 보고 가장 슬퍼했습니까? 지금 주위 사람 중에 누가 죽는다면 가장 슬퍼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시급히 할 일은 무엇입니까?


4. 천국에서 가장 높아지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천국에 들어간 후에 누가 높고 누가 낮은지 의미가 있을까요? 그러면 왜 예수님은 천국에서 높아지는 방법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셨을까요?


5. 천국의 모습을 상상해서 말씀해주십시오. 기본적인 모습은 요한계시록 21-22장에 어느 정도 있지만 정확한 모습은 아무도 모릅니다. 천국을 실감나게 느껴보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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