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능력 주께 있도다

작성자 정보

  • 김중곤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이번 5월4일에 광주 한 여중 2학년 학생이 자살했습니다. 파마하고 학교에 온 학생에게 선생님이 답답해서 파마를 풀고 오라고 집으로 돌려보내며, 부모님께 아이의 머리가 불량해서 돌려보냈으니 머리를 풀어서 학교에 보내라고 했는가 봅니다. 이 전화를 받은 아버지는 화가 나서 딸에게 전화로 나무랬는가 봅니다. 선생님과 아버지에게 잘못을 지적받은 이 학생은 자신을 주체하지 못해 15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습니다.

여중생이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등. 요즘 신문을 보면 젊은이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내용들이 즐비합니다. 참 어려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세상에서 내 맘처럼 되지 않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되어지지 않고,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를 받기도하고 믿음에 많은 도전을 받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이 세상의 사회구조를 움직이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사회구조라는 말을 “이 세상 풍속”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풍속을 지배하는 자는 다름 아닌 마귀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공중 권세 잡은 마귀는 먼저 내가 서있는 학교와 직장의 구조를 부여잡고 우리의 신앙을 위협해 옵니다. 구조가 세상적이라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게 합니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공중권세 잡은 자에게 속아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이 마귀에게 속아 넘어 가는 수없는 크리스챤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직장이 힘든데 어떻게 예배드릴 수 있습니까? 이렇게 세상모임이 있는데 어떻게 교회모임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지 않아도 사는데 지장이 없는데 왜 기도를 강요하십니까? 왕따 되면서까지 그렇게 신앙을 지켜야합니까?

그러면 사회문제가 해결되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외적인 공격이 없으면 영적인 문제를 들고 나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직장이라고 해서 신앙을 잘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학교라고 신앙을 잘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신학대학에 가면 우리의 신앙이 나아질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신앙은커녕, 삶의 기본기마져 던져버리는 사람도 수두룩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갈 때까지 싸워야합니다. 내 자신을 주님의 손에 의탁하면 나의 힘이 되시는 주님이 나를 이기도록 하실 것입니다.

세상을 밝힐 수 있는 발전기가 나에게 연결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안에서 촛불보다 약한 빛을 발하기도 어렵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을 태울 수 있는 타이타닉과 같은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 혼자만 서 있어도 버겁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받고 그 말씀으로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챤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서 승리는커녕 패배하고 겨우 명맥만 유지되어간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교회를 비웃고 있습니다. 기독교 게토화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과거 유대인들에게 게토라는 집단거주지가 있어서 자기들끼리 모여서 예배드리면서 살아갔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자신들이 더렵혀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현대 기독교도 교회에 갇혀서 자기들끼리만 교제를 나누고 만족해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좋아하고, 자기들끼리 헌금 걷어서 배불리 먹고, 즐기고, 정작 사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않으면 때가 이를 때 거두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풍속과 공중권세 잡은 자를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님께서 이길 능력을 주셔야합니다. 이미 성령님께서 우리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싸움은 나 자신만의 싸움이 아닙니다. 내안의 주님께서 이김을 주십니다. 나의 싸움이 아니라 내안의 그분이 싸우십니다. 오늘본문에는 질그릇같이 연약한 내 안에 큰 능력을 가지신 보배로운 주님이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능하신 주님이 계시기에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산산조각 낼 수 있고, 이 세상 풍속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내안에 보배로운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세속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그 조류를 거슬러 올라가야합니다. 새벽이슬같은 청년들이여 누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바로 생명의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된 그대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죽은고기와 살아있는 고기의 차이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죽은 고기는 아무리 크다할지라도 물결을 따라 흘러내려갑니다. 왜 그런가?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없으니 물 흘러가는 그대로 간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살아있는 고기는 비록 송사리라 할지라도 물결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크기입니까? 아닙니다. 생명입니다. 생명이 있으면 이 세상풍속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핵심은 성령님안에 계시는 생명에 있는 것입니다. 덩치 크다고 강한 교회가 아닙니다. 생명 있으면 이 세상의 모든 물결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권능이 생깁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핵심 또한 나의 외모나, 학식이나, 직장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안의 그분이 생명으로 역사하실 때 내 자신을 그 분께 드릴 수 있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생명으로 역사하기를 원하십니다.

유럽에서 제일 못사는 나라가 프랑스랍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를 살펴보면 1960년대부터 프랑스에서는 뉴 모랄(new moral)이라는 새로운 도전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자유연애를 강조하고, 프리섹스를 강조하는 일입니다. 그때 이 운동의 주창자가 프랑스 지성계를 대표하는 사르트르와 그의 아내 시몬느입니다. 이들이 처음으로 계약결혼을 만들어냈습니다.

많은 지성인들이 ‘아 지성인들이 저렇게 사는구나, 참 멋있겠다’하며 부러워했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조금 유명한 사람이나 텔레비전이나 영화의 스토리는 진실이 아닙니다. 그 사람처럼 사는 것이 멋진 인생이 아닙니다. 그것을 파멸입니다. 어떻게 보면 프랑스에서 제일먼저 프리섹스의 물결이 범람했습니다. 남자 한명 당 섹스파트너가 평균17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회의 물결이 우리나라에 몰아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타락할 때로 타락하고 있습니다. 저는 정말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습니다.

어느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베트남참전을 하는 동안에 유혹을 받아 다른 남자와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살아서 돌아와서 직장생활을 하던 남편이 어느 날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남편은 무섭도록 냉정한 사람이어서 이 사건을 그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처리하기로 했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확하게 출근/퇴근하고 월급도 잘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집에서 아내와 절대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같이 잠자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아내가 없는 것처럼 한 집안에서 생활했습니다. 사실상의 별거생활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생활입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입니까? 월급 갖다 준다고 삶입니까? 부부입니까? 한집에 살고 있다고 부부입니까? 만일 이런 생활을 계속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범죄한 그의 백성에게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은 산 아래에서 무엇을 합니까? 40일 동안 모세는 산에 올라가 소식도 없지 우리를 인도할 신은 어디에 있느냐며 금송아지를 만들어 범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33장3절에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젖과 꿀이 흐리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가나안땅으로 인도하겠다고 약속했지? 그래 약속은 이행한다. 그러나 너희와 함께 가지는 않겠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동행하시면서 말씀도하고, 책망도하고 위로로 하시던 그 교제를 그만두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철회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임재를 상실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시대의 일이 아닙니까? 이 시대의 수없이 많은 크리스쳔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한 채 공중권세 잡은 자의 시녀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하고 살아가는 대로 불구하고 그 사실조차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당장은 살아가는데 별 지장이 없을 수 있습니다. 마치 월급 제때 가져다주고, 출퇴근 정확히 하는 남편과 뭐가 다릅니까?

아무튼지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백성들은 참회하고 슬퍼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3장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하나님은 회개하는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친히 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해결하십니다.

내안에 보배로우신 생명으로 계신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내가 친히 가리라는 말씀으로 내 삶에 채우십시오. 질그릇같은 내가 나를 실망시킵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질그릇같은 내 자신이 능력 있다는 껍질이 빨리 깨질수록 내안의 보배로우신 주님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보배로우신 주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을 들으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의지하면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 의지하십시오. 생명의 성령님 의지하십시오.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25 / 1 Page
번호
제목
이름

성경공부


최근글


새댓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