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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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중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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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보루 사사기 19장 22-30

1월을 영어로 재뉴어리(january)라고 합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신“야누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야누스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신으로 한쪽은 앞을 또 한쪽은 뒤를 바라보는 희귀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1월이란 야누스가 그런 것처럼 지난간 한해를 돌아보면서 또 한편으로는 다가올 새로운 한해를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과거를 보면서 동시에 미래를 보는 것이 바로 현재라는 뜻이고, 특히 1월은 그러한 의미가 더욱 가슴으로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새해를 시작하면서 지나간 한해를 돌아보며, 더욱 새롭게 주님께 충성하고 믿음으로 살기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서 우리의 한 얼굴은 이스라엘의 실패가 나의 실패로 여기고, 한 얼굴은 그런 실패를 극복하고 새롭게 펼쳐질 한해를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내용은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한 레위인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레위인이 첩을 얻었는데 이 첩이 다른 남자와 음행을 하고 친정집으로 돌아갑니다. 넉 달이 지나서 레위인은 첩을 찾으러 갑니다. 첩의 아버지는 이 사위를 환영합니다. 레위인은 그 집에서 며칠 잘 대접을 받고 첩과 함께 돌아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장인이 심하게 만류하는 통에 몇 번 출발을 연기하고 그 집에 머무릅니다. 그러나 결국은 더 있다 가라는 말을 듣지 않고 느즈막한 시간에 길을 떠납니다.

노중에 밤이 되어 가까이에 있는 여부스에 유할까 하다가 그래도 이방인의 성보다는 이스라엘의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가 나을 것으로 보고 거기 유하게 됩니다. 기브아에 들어갔지만 영접하는 사람이 없다가 한 노인이 이들을 영접합니다. 그런데 기브아의 베냐민 사람들이 시비를 겁니다. 이 사람을 끌어내라는 겁니다. 마치 소돔 사람들이 천사에게 시비를 건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노인이 만류하다가 결국 이 사람이 첩을 내어주었더니 기브아 사람들이 밤새 행음하고 놓아주었는데 여인은 죽게 됩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서 동족상잔의 전쟁이 발생하는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사기 17장부터는 더 이상 사사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구원할 사람을 보내주시지도 않을 만큼 타락해 버렸음을 알게 됩니다. 그 극치는 끝없는 타락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름도 밝히지 않은 어떤 레위인으로 소개되는 이 사람의 이야기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도덕적으로 얼마나 타락하고 무너져 있었는지를 가늠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레위인은 성전 일을 맡기시려고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세우신 사람들입니다. 즉 거룩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별되어 일하라고 세워주신 일꾼입니다. 누구보다도 더 정결해야할 레위인이 첩을 얻었다는 사실만으로 당시의 믿음의 상황을 짐작케 합니다. 그

레위지파가 책임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이 부패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드리는 예배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런 곳에서 어떻게 진정한 예배의 회복과 예배의 감격이 있겠습니까? 예배는 형식과 의식만 남게 됩니다. 진정한 예배의 회복이 없는 부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배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어디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로 1907년 장대현교회의 부흥을 다시 재현하려는 시도는 예배로부터 출발되어야합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합니다. 예배속에 실패자가 하나님앞에서 위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타락한 사람이 회복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좌절과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 용기를 얻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예배의 자리에서 뜨거운 감격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장이 예배가 되어야합니다.

진정한 예배의 회복이 없는 부흥은 참된 부흥일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 꿈쟁이들이 함께 드리는 예배도 언제나 뜨거운 감격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장이 되어야할 줄로 믿습니다.

예배의 실패자인 레위인의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첩을 찾으러 갔는데 장인어른이 자꾸 놀고 즐기다 가라고 붙잡습니다. 결국 그는 인정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곳에서 5일을 보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1월은 야누스처럼 두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해 한가하게 놀며 보낸 의미없는 시간들, 사소한 인정 때문에 실패한 삶의 자리에서 이제는 담대히 일어서기 바랍니다.

자신에게 목표가 있는 사람은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놀고 먹고, 즐기는 것이 전혀 없을 수는 없겠으나, 끊고 맺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재미에 빠지면, 무엇이 가치있는 행동인지?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 관심밖에 있어서 선택의 기준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무엇이 진실로 옳은 선택인지를 모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난해 여러분이 텔레비전 앞에서 보낸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로 분주하게 보낸 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정욕적이고 세상적인 일에 보낸 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영화를 보면서 보낸 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난해에 흥행한 영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폭력과 정욕에 관한 영화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왜 이런 영화가 성공합니까? 우리가 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영화를 봅니까? 우리들의 마음속에 폭력과 정욕에 대한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제는 정리하십시오. 우리 크리스챤이 그런 영화를 불매운동을 하지는 못할지언정 그 영화를 보면서 즐기는 것은 조절할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까지도 조절하십시오.

오늘 레위인을 보십시오. 조직폭력배들이 몰려와서 “네 아내를 내 놓으라”고 할 때 적어도 남자라면 목숨걸고 싸워야하지 않겠습니까? 본문에 그 아내를 붙잡아 끌어낸 사람은 다름 아니라 그 레위인입니다. 결국 자신의 아내를 깡패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목숨을 구하는 치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밤새 윤간을 당하고 그 아내가 죽어버립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에 레위인이 보여준 반응을 보십시오.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하나님앞에 옷을 찢고 회개해도 부족할 판인데, 비겁하게 자신의 아내의 시신을 조각내어 12지파에 보내어 결국 민족이 전쟁하는 참사를 가져왔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적어도 한 여성만은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을 팔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치사한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매들이여! 적어도 자신만을 위해 목숨까지 걸 수 있는 형제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비겁한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전에 마태복음 5장을 살펴보면서 우리 크리스챤을 세상을 보루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보루라는 뜻은? 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거나 적의 포화에서 아군을 보호하기 위하여 돌, 흙, 콘크리트 따위로 튼튼하게 쌓은 진지입니다. 적의 공격이 없을 수는 없으나 보루라고 말하는 것은 기둥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즉 기둥이 무너져 버리면 건물이 무너져 버리듯이 기둥과 같이 세상을 받들고 서 있어야할 사람은 우리 크리스챤 뿐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보루라는 것은 사탄의 치밀하고도 날카로운 공격을 막아낼 자는 우리밖에는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세상의 보루인 우리가 빛을 발하지 않으면 세상은 어디에서도 빛을 볼 수가 없고, 세상의 소금인 우리가 맛을 내지 못한다면 세상은 그 어느 곳에서도 맛을 느낄 수 없는 비참한 곳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육간에 타락은 우리민족의 연약함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난 한해 365일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자신의 시간이나 사회의 뉴스들을 더듬어보십시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연예 모든 분야에서 죄짓기 대회를 한 것 같지 않습니까? 요즘 날이 갈수록 그런 어두움과 의미 없음과 답답함을 느낍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줄기세포의 허위논문으로 지식인들의 말에도 얼마든지 거짓이 있을 수 있음을 보았고, 국회를 떠나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정치인들의 군중심리를 이용한 협박도 늘 보아왔습니다. 자신들의 허물과 연약함을 감추려고 계속해서 거짓을 일삼는 사람들의 말로는 대부분 그 결과로 인해서 처절한 절망을 경험했습니다. 사과 궤짝속에 수백억의 돈을 쌓아두었다가 발견 되질 않나, 군 입대를 하지 않으려고 술에 약을 따서 아버지를 살해하질 않나, 여중생이 아파트 계단에 낳아 방치해 둠으로 아이의 생명을 잃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회의 여러 가지 연약함 가운데에는 우리 크리스챤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가정을 소홀히 생각하고 행음하고 집을 떠나버린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당시의 무너져버린 가족을 봅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공동체로 가정을 창조하셨습니다. 가정은 인간의 기초이며,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곳입니다. 가정을 떠난 어떤 쾌락이나 즐거움도 그것은 일시적인 재미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사회 현실을 직시해보십시오.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이 즐기고 찾는 것들은 대부분 감각적이고 정욕적인 것입니다. 그런 사회는 술과 여자와 쾌락이 전체사회를 지배합니다. 그 사회는 살았다는 이름은 있을지 모르나 이미 죽어버린 사회요. 죽은 공동체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쾌락과 범죄로 멸망했다는 것은 우리가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쾌락과 범죄의 사슬이 끊어지지 않는 것은 사탄이 그 부분을 강력하게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악인지 알면서도 잘 끊어지지 않은 것은 그만큼 사단은 강하게 공격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우리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영적인 감각이 마비되어 겉은 크리스챤인 것처럼 보이나 속사람은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비참한 실패자가 되어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레위인은 철저한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고 쾌락속에 있는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결단해야할 시기입니다.

우리가 본문의 레위인처럼/ 이스라엘처럼 타락하고 무너져버리면 결국 이스라엘에 소망이 없어진 것처럼/ 세상의 보루인 무너져 버리면 세상은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서두에 소망이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삶이 지옥의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소망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되어주십시오. 쾌락의 유혹앞에 자신을 정결케하고 깨끗하고 정결한 신부처럼 신랑되신 주님께 우리 인생을 드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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