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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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중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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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을 찾습니다.(행 7:55-60)

얼굴은 사람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사람됨을 얼굴에 가장 민감하게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의 얼굴은 인격의 표현이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세계의 어떤 민족보다도 얼굴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것이 한국의 문화적인 전통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얼굴을 인간의 행동을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해왔습니다.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뵐 낯이 없습니다. 얼굴에 먹칠을 하지 말라. 그 사람 얼굴 한 번 뻔뻔하다. 그 사람 얼굴 참 넓다. 제 얼굴을 봐서 한 번만 부탁 드립니다”

저는 호신대에 입학해서 여러 사람들에게서 얼굴에서 빛이 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요즘 제가 쬐금 힘들어했더니 나성헌 목사님이 요즘 제 얼굴에서 빛이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힘들어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말일 겁니다. 아무튼 우리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우리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농담반 진담반 이렇게 말하잖아요. “네 얼굴에 써있다. 네 얼굴에 써졌다”

이렇듯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그 사람의 삶이 들어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두 주전에 스데반집사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다는 말을 나누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시고 사형을 선고 받았던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있으면서도 이렇게 얼굴이 천사와 같다는 의미는 그는 전혀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만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공포스런 재판의 자리에서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는 것은 스데반이 정말 선하고 의롭고 참된 신앙인이었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청송감호소라는 말만 들어도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5공 시대에는 안기부란 말을 들어도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런 공포스런 자리에서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와 같다는 그 자체만으로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했는지 짐작할 만 합니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그대의 얼굴이 천사처럼 다른 사람에게 비춰지기 바랍니다.

곁에 계신 분께 질문해보세요. “내 얼굴이 천사 같니?”

오늘 본문은 천사와 같은 얼굴을 가진 스데반의 죽음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성경에게 가장 길게 죽음에 대해 소개할 만큼이나 주님은 귀히 여기셨습니다. 스데반의 이 모습은 우리에게 귀한 모범을 보여줍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고 그 뜻을 이루어드릴 마음으로 충만하여 천사처럼 보였습니다. 외모만으로도 얼마나 은혜가 되었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정말 천사처럼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천사와 같이 흔들림 없는 스데반 같은 사람을 찾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데반처럼 주님사람에 충만하여 신앙생활하기를 원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첫째는 성령님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본문 55절은 죽음의 자리에서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라고 기록합니다. 우리도 죽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으로 충만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요?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우리 주님께 너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평가 받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이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맡겨진 일에 책임을 다했기에 죽음의 순간에까지 성령님으로 충만케 하셨습니다. 책임이라는 영어의 단어는 “responsibility"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두 개의 단어가 결합되었습니다. 즉 ‘응답’(response)와 ‘능력’(ability)의 합성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올바르게 응답할 때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난 이틀간 알파 성령수양회를 다녀왔습니다. 성령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신이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이 자신에게 임하지 않았다며 마음에 기쁨을 잃고, 하나님을 의심하기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령님은 사모하는 심령을 만족케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기도했으니 이렇게 임하고, 저렇게 기도했으니 저렇게 역사하라는 것은 우리가 성령님의 주인으로 내 뜻대로 성령님이 일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표현할까요?

성령님은 순종하는 사람에게 충만하게 주어집니다. 성령님은 순종하는 사람들을 붙드시고 지배하시고 충만하게 임하셔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도록 그 사람과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죽음의 순간에 성령님으로 충만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를 붙드셨습니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성령님으로 충만하길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진 일에 지금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순종한 사람이 오늘 성령님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매일 순종하여 성령님께 붙들린 사람이 평생을 성령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은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죽음의 자리에 섰습니다. 하나님께서 돕는다는 것이 반드시 죽음을 면하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죽을 때에 죽어야합니다.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장면에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전도하는 스테반을 죽지 않도록 왜 막지 않으셨을까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의 죽음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하여 그에게 죽을 수 있는 힘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는 성령충만하여 죽음의 자리에 섰습니다. 그토록 담대하고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스데반을 바라본 사울이 결국 바울로 변화되는 역사에 불길을 던진 것입니다.

둘째는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드디어 성밖으로 내 던져져 돌에 맞아 죽어갑니다. 그 돌이 던져지는 순간에 스데반이 드린 기도를 보십시오. 60절입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여러분 어디서 많이 듣던 기도 아닙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드린 기도와 똑같은 기도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아서 피흘리게 하고 창으로 자신의 옆구리를 찌르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남긴 한 벌의 겉옷을 차지하기 위해 제비를 뽑으면서 자신을 비웃고 조롱하던 무리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주님의 이 마지막 기도를 스데반은 배웠던 것입니다.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던 것은 바로 예수님의 얼굴이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지금 얼마나 원통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죄 없는 스데반을 모략했습니다. 죄 없는 그를 성밖으로 내 치고 돌로 치고 있습니다. 그 순간에 스데반은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저 유명한 화란의 코리텐 붐 할머니는 독일의 나치 치하에서 말할 수 없는 잔인한 핍박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코리 할머니의 언니는 돌일 수용소에서 나치들의 고문에 못 이겨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코리 할머니는 얼마나 독일 사람들이 미웠겠습니까? 히틀러나 그의 잔당들이나 자기를 고민하던 그 대상들이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코리 할머니의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의 복음을 전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이 할머니는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의 마을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날도 독일의 한 촌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설교가 끝나면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와 인사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할머니는 줄을 서서 기다리며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얼굴 가운데 뜻밖에도 독일의 그 감옥에서 자기를 고문하고 자기 언니의 목숨을 앗아갔던 간수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코리 할머니는 자기 자서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순간 내 심장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는 한 마디로 [하나님, 저 인간만은 용서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그 할머니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용서와 사랑을 외치고 있던 코리 할머니의 앞을 향하여 자기에게 가장 결정적인 피해를 입혔던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계속 코리 할머니의 마음속에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었다고 합니다. “코리야 용서하라” [하나님 용서할 수 없어요]“용서하라” [못해요] 이렇게 싸움을 하고 있을 동안에 그 사람은 벌써 할머니의 눈앞에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코리 할머니의 마음속에 번개같이 스쳐지나가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나는 네가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겠느냐, 안하겠느냐를 묻는 것이다. 용서하라는 것은 나의 명령인데, 내 명령앞에 순종하겠느냐 안하겠느냐?”

코리 할머니는 자기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는 그때 그 사람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용서해야 한다는 주님의 명령이 내 마음속에 깨달아지는 순간[하나님의 명령이라면 할 수 없지요. 그러면 용서해야지요]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과 느낌이 없이 다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내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손을 내 밀어 그를 안는 순간 주께서 내마음속에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는 느낌을 부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 일기장에 마지막에 이런 인상깊은 글을 썼습니다. “명령을 수행하는 능력은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랑하고 용서하기로 결심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스데반도 사람인데 자기를 모략하고 시기하고 돌을 던지는 그 사람들이 왜 밉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순간에도 그의 시선은 하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의 귀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고, 그의 얼굴은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주께서 그에게 바를 핍박하고 죽이려는 원수들을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의 얼굴은 천사와 같았던 것입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고계신 주님께서는 이때 벌떡 일어서셨습니다. 이 귀한 영혼을 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의 마지막 영혼을 받기 위해서 주께서 일어서신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예수님을 닮아갔던 그 사람, 성령님으로 충만했던 그 사람, 용서하며 믿음으로 죽음을 맞이했던 그 사람 스데반... 저는 오늘 제 2, 제3의 스데반을 찾습니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예수님처럼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스데반을 찾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제 2, 제3의 바울이 탄생될 것입니다.

왜 그렇게 쫓겨 다니십니까? 왜 그렇게 피곤해 하십니까? 왜 그렇게 허둥대십니까? 세상 짐 다 짊어진 사람처럼 미소하나 없이 살고 계십니까? 내 힘대로, 내 방법대로 세상이 되어지질 않습니다. 그분이 내 안에서 일하도록 그분의 미소를 담으십시다. 핍박과 죽음의 함성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았던 스데반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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