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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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중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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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극장에 상영되는 새로운 영화중에 공공의 적 2가 있습니다. 아직 저는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처음 공공의 적1은 몇 년전에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영화에서 자신의 성공을 위하여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부패한 한 사람이 나옵니다. 펀드 메니져였던 이 사람은 자신의 부모가 많은 재산을 자신에게 상속하지 않고, 고아원을 세우는데 쓰겠다는 말을 듣고는 그 밤에 부모를 살해합니다. 돈과 권력을 위해서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자신의 도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영화의 스토리입니다만 우리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는답니다. 우리는 이런 아들을 볼 때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주먹이 쥐어지고, 그 아들을 향하여 비난을 퍼부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들은 우리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경안에도 그런 불효막심한 아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나오는 누가복음 15장은 “복음서 속의 복음”이라고 불릴 만큼 기독교의 복음을 잘 보여주는 세 가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잃은 양 찾은 목자이야기와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이야기에 이어 잃어버린 아들입니다. 이중 세 번째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본문이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서 그렇지만 대게 아버지의 재산을 아들들에게 나눠주는 시기는 보통 아버지가 죽었을 때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나누어줄 수는 있으나 그 소유권은 아들에게 넘어가지만 그것의 처분권은 아버지에게 남아있고 아들은 아버지가 죽은 후에야 처분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둘째아들은 아직 아버지가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두 권리를 다 요구하였습니다. 다른 내용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내용을 보기만 해도 둘째아들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아버지를 무시하고 자기마음대로 하려고 하는지 알게 됩니다. 재산을 상속받았다면 마땅히 아버지를 보살펴야하고 그것이 아들의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아들은 재산을 처분하여 집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둘째 아들의 이런 자세는 아버지의 권위와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아버지를 죽은 것처럼 만드는 불효한 자세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가출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다 그러하겠지만, 집만 벗어나서 나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으로 착각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팔아 나섰을 때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자신의 맘대로 될 줄 알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합니까? 쉽지 않습니다. 그는 그 많은 재산을 다 허비했습니다. 성경은 그 아들이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돈이 있을 때는 자신이 대통령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라 착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다 허비하고 나자 그는 아무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는 비참한 자리로 내몰아졌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돼지를 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도 않습니다. 부정한 동물이라고 돼지 치는 일은 금지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유대인들에게는 금지된 돼지 치는 일을 했다는 것은 어려움 속에서 자기 동족들에게서 조차 도움을 받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동족들에게 버림받고 이방인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만큼 버림을 받았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내 힘과 내 방법으로 뭐든지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인생을 탕자처럼 비참하게 만듭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수치스러운 돼지를 치면서도 그나마 제대로 먹을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배고픔이 너무 심하여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라도 배를 채우려 했지만 채울 수 없었습니다. 결국 탕자는 아버지를 떠난 후에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민족, 종교, 심지어 인간의 존엄성마저 다 잃어버리는 비참한 처지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작은아들에게 있어 잘못은 첫째,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살려고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한 것입니다. 둘째는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저버리고 자기의 유산을 미리 받아 아버지를 떠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한 삶을 통해 다 탕진해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상실한 비참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살려는 유혹을 이기셔야합니다. 세상의 화려함, 세상의 방법으로 하면 더 풍성할 것이라는 유혹을 극복하셔야합니다. 죽어도 하나님품에 있겠다는 결단을 하십시오. 그래야 살 길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16.17절입니다.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자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매여서는 안됩니다.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을 자극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하와를 유혹하자 하나님께서 먹으면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던 선악과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창 3장 6절입니다.“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유혹했던 말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됩니다. 마4:8-9절입니다. “8-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은 네게 주리라”

사탄은 예수님도 유혹했습니다. 그 사탄은 우리도 유혹합니다. 또 유혹할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거짓말쟁이입니다. 그가 하는 모든 말에 진실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실제 사탄에게 절하면 사탄이 천하만국을 줄 수 있겠습니까? 천하만국을 언제 주님이 사탄에게 주셨던가요? 사탄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우리는 속아서는 안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유혹했던 것처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한 유혹을 우리게 던질지라도 주님의 뜻이 아니면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갖기 바랍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름으로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 더불어 말씀드리자면 한 사람이라도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유혹받으면 남편이 정신을 차리고, 아내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어야합니다. 남편이 유혹을 받으면 아내가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와가 유혹받았을 때 아담이 그것을 옳지 않다고 했어야 옳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나니아가 유혹 받았을 때 삽비라가 정신을 차리고 남편을 돌이켜야 둘 다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위대한 사랑은 재산을 다 탕진하고 되돌아오는 불효막심한 아들을 맞이하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20절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가 아들이 아직 멀리 있는 동안에 발견하였다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언제 돌아올지 알지 못하는 아들을 언제나 기다리고 계셨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 떠나 세상속에 살면 반드시 실패할 것을 아시는 아버지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십니다. 그 아버지는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오시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아들을 향해 아버지께서 달려가십니다. 당시 어른들은 달리지 않는 것이 습관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관습과 전혀 맞지 않게 어른이 달려간다는 것은 아들을 다시 가지게 된 기쁨과 그를 맞아들이고자 하는 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살펴보면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진실한 사랑을 알게 됩니다. 먼저 아버지는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이 행동은 이미 내가 다 용서했다는 행위입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힙니다. 이 행동은 아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행위입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줍니다. 이 행동은 아들의 권위를 회복시키는 행위입니다. 발에 신을 신겨 줍니다. 이 행동은 이 아들이 종이 아니라 자유인인 아들의 위치 확인해 줍니다. 그리고 큰 잔치를 배설합니다. 이 행동은 아버지의 기쁨을 표현합니다.

본문을 잘 살펴보면 놀라운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금 발견하게 됩니다. 즉 아들이 돌아오면서 아버지를 만나면 해야 할 말을 준비합니다.18-19절입니다.“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서서 하리라 하고” 그러나 실제로 아들이 돌아가서 아버지를 만났을 때에는 그 말을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준비한 말을 다 마치기 전에 아버지가 그 말을 끊고 아들을 대접해주었기 때문이다.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너를 인해 받은 손실이 얼마인지를 따지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 완전히 만족하신 분이 아버지십니다.

그 어떠한 죄악의 자리에 있었다 할지라도, 아니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할지라도 아버지는 그 영혼을 아무 조건없이 받아주시는 좋으신 아버지십니다. 만일 아버지께서 조건을 만드신다면 어떤 사람이 주님앞에서 용서하심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주님께서 100번까지만 잘못하면 용서해주겠다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주님의 용서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단 한 사람도 주님의 용서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끝없는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와 허물의 수에 대해서 묻지 않습니다. 과거의 실패와 행위를 묻지 않으시는 좋으신 아버지십니다.

그러면 이제 큰 아들의 모습으로 돌아가 봅시다. 큰 아들의 삶을 살펴보는 것은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오랫동안 아버지를 섬기는 모습은 충성스럽게 주님과 동행하는 우리 성도님들의 모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아들은 유산에 대한 처분권을 아버지께 드리며 아버지를 모셨습니다. 아무런 불만없이 아버지를 섬기며 봉사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서 심각한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의 동생이 타지로 갔다가 오랜만에 돌아왔는데도 즐거이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가 그를 너무 과하게 대우한다고 하여 분노를 터뜨립니다. 아버지와 집안의 모든 하인들은 기뻐하는 데 왜 큰 아들이 화를 냈겠습니까? 하나는 작은 아들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렇게 환대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과 둘째로 자기와의 비교 때문입니다. 나는 아버지를 떠나지도 않았고 재산도 허비하지 않았는데 대접은 해주지 않았는데 왜 아버지는 동생을 더 잘 대접해주냐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해보자면 왜 오랫동안 신앙생활 잘하는 나는 대접해주지 않고 새신자나 별로 하나님앞에 부족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더 사랑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별로 특별하지도 않은 새 가족이나 연약한 사람이 교회에서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으면 기쁨니까? 아니면 화가 납니까? 교도소에 매달 음식 가져다주고, 생일 때 선물 사다주는 것이 기쁨입니까? 아니면 왜 교회에서 나는 알아주지도 못하는가?하고 화가 나십니까?

만일 우리가 둘째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고 잔치를 배설해주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충분히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큰 아들도 아버지의 아들이고, 아버지가 그에게도 유산을 나눠주었습니다. 12절 마지막을 보면 각각 나눠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재산은 이미 그의 것입니다. 그리고 곧 그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큰 아들은 오직 지나간 삶 속에 자기와 동생 중 누가 더 바르게 살았느냐에 대한 율법적인 평가만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교회에서의 직분에서 충성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아버지가 사는 방법으로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사랑하면, 나도 사랑하고 아버지가 기뻐하면 나도 기뻐하며, 아버지가 용서하면 나도 용서하며, 아버지가 영접하는 사람은 나도 영접하며, 아버지가 환영하는 사람은 나도 환영하며, 아버지가 환영하는 일에 나도 환영하며 기뻐하는 일이 되어야합니다.

큰 아들은 집안에서 아버지를 위해 일했지만 그 일은 율법적인 일이었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가장 기뻐하는 일을 분노로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큰 아들처럼 가출도 하지 않았고, 재산도 탕진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진짜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하고 있는지 살펴보셔야합니다. 아버지의 기쁨은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어떤 직분을 지키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잃어버린 영혼을 주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실패한 작은아들에만 향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작은아들에 대해 악감을 가지고 불만을 토로하는 큰아들에게도 사랑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큰아들이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위해 베푼 잔치에 들어오기를 거절하자 아버지는 큰아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나가서 들어오라고 권합니다. 31-32절입니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고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얘]하고 부르는 것은 아들아! 하고 부르는 사랑의 모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갈릴리에서 그물을 던지는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도 동일하게 “얘들아”하셨습니다. 이는 밖에서 고집을 피우고 있다고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잔치에 함께 참석할 것을 권면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직분이나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마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아버지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고, 아버지의 소원이 나의 소원이 되어 순종하며 나아갈 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크게 주님께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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