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호신에 교수가, 신학생이 없다고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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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9월 5일 약 130여명의 신대원 학우들, 교수님들과 함께
남원 산내면 수해현장을 찾았습니다.
뉴스로만 보여지는 그들의 고통을 위해
말로만 기도하는 것이 너무도 죄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나의 안전이 차라리 고통이었고
감사의 조건들은 천근만근 바윗덩어리였습니다.
헌금 얼마 내는 것만으로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어보다는 행동으로 기도하고픈 마음이 있었습니다.
나 한 사람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할까마는
그래도 불붙는 장작더미 속의 말라빠진 나뭇가지라도 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산내면에 들어서자 광주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TV에서만 보아왔던 상황들이 실제로 다가왔습니다.
이미 새카맣게 그을린 군인들이 점령하고 있는 마을은
꼭 전시상황처럼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마을을 덮쳤던 하천은 그 위세는 사라진 채 무심히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탄식과 동동거리던 발구름도
흙탕물과 함께 떠내려갔는지
체념한 듯 포기한 듯한 사람들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습니다.

우리가 타고갔던 차들이 우리를 쏟아놓자
학교 운동장은 이내 일일근로자대기소가 되었습니다.
어떤 학우가 노예시장 같다고 하는 바람에
그 와중에도 우리는 쿡쿡 웃어댔습니다.
아! 우리는 죽었다 깨어난다 하여도 수재민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할 것입니다.
웅성웅성, 오합지졸 같은 우리들을
그 마을 이장님이라는 분이 한심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저것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으려나!"
산내교회 사모님께서 마치 총사령관처럼
우리들을 삼삼오오 맞추었다 흩으셨다 하더니
벼를 세울 사람, 고추를 딸 사람, 삽질을 할 사람들 별로 나누어 차를 타게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마치 태극기를 흔들고 전장으로 떠나는 학도병처럼
차에 실려져 운동장을 빠져 나갔습니다.

저를 비롯한 몇몇 학우들은 공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공장은 "지산공예"라는 곳이었는데 제기나 바리를 만드는 곳으로 3대째 가업을 이어온 집이며 전국에서 필요한 물량 60%정도를 감당하고 있었노라 하였습니다.
완성품과 재료들이 있어야 할 창고에는
거대한 물줄기가 운반해 온 토사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마당에는 창고에서 삽질하여 날라온 흙들이 새로 생긴 산처럼 쌓여 있었고
그 작은 산을 포크레인은 다시 무너뜨려 무시무시한 트럭들에게 실어주었습니다.
그 트럭들은 쉴새없이 들락거렸습니다.
본래 있었던 도로는 아직 형체를 드러내지 못하고
새로 생긴 길은 그 트럭들에 의해서 진짜 도로처럼 다져지고 있었습니다.
옆에는 지붕도 없이 기둥만 멀뚱하게 서 있는 집이
때아닌 폭염 탓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보였습니다.

우리들이 할 일은 하천을 따라 내려가며 떠내려가다
걸려 있는 그릇들을 주워 모아 가마니에 담는 작업이었습니다.
장인의 혼이 담겨있을 그릇들이
수풀에 걸려있거나 하천 모래 속에 반쯤 파묻혀 있었으며
커다란 바위 옆에 금이 간 체로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그릇의 형태가 절반 갖추어진 것, 아직 아무런 형태도 없이 나무 토막 그 자체인 것들까지도
우리는 주인의 안타까운 마음을 생각하며 모았습니다.
목사후보생들 손에 의하여 구출되어진 제기와 승려들의 밥그릇 바리.
그 공장 안주인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하였습니다.

너무 강한 햇볕에 노출된 탓인지 우리는 서로 현기증을 호소하였습니다.
뜨겁게 달구어진 하천의 크고 작은 돌들을 밟고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며 걷는 일은
우리를 금방 지치게 하였습니다.
그것 뿐 아니라 나무에 걸린 죽은 돼지의 악취는
우리들의 속을 울렁거리게 하며 두통마저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고가 수재민들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119구조대와 MBC 보도차량이
5분만 가면 함양이라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실종된 할머니의 시신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20가마니 정도의 그릇을 모아놓고 다시 공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낯익은 분들이 열심히 흙을 퍼서 나르고 계셨습니다.
책하고 씨름하시느라 흙 퍼담는 일은 못하실 것 같은 교수님들이셨지만
최소한 그 순간만은 순교의 정신으로 비지땀을 흘리시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셨습니다.
교수이기 전에 목사이신 그 분들의 땀이 강의실에서 흘린 땀보다 더 귀하게 생각되어졌습니다.
어떤 교수님께서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눅 16:3)라는 말씀을 인용하시며
체력과 교수라는 직책의 한계를 한탄하시는 바람에 힘든 중이였지만 잠시 피곤을 잊었습니다.

이제 모아진 그릇들을 물로 씻는 작업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물을 만지니 조금 살 것 같았습니다.
손으로 하나하나 일일이 씻고 있는데 소방호스가 등장하여
순식간에 힘들게 씻어야 하는 작업의 절반 이상을 해 주었습니다.
깨끗해진 그릇들을 다시 수건으로 닦아서 차곡차곡 포개었습니다.
금방까지도 흙탕물을 뒤집어 쓰고 있던 그릇들이 다시금 윤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유난히도 까맣게 윤이 흐르는 그릇은 옻칠을 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주인이 그릇 하나를 어린애를 안은 듯 가져와서는 따로 씻어 달라고 했습니다.
살펴보니 그릇 가에 누런 칠이 있었습니다.
그 칠은 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의 가격은 오백만원 정도인데 제사에 사용할 그릇 모두를
그런 그릇으로 주문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뭉툭한 나무토막 하나가 이렇게 변할 수 있다니...
토기장이 하나님을 떠올리며 지금 나는 어떤 정도의 그릇으로 다듬어졌을까 생각도 보았습니다.

민간소방대원들의 민첩한 손놀림에 힘입어 우리가 해야할 일은 쉽게 끝이 났습니다.
가게 안에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쌓여있던 그릇들이 어느 순간 다 씻어진 것을 보니
"눈처럼 게으른 것이 없고 손처럼 부지런한 것이 없다"라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떠 올랐습니다.
시간이 되어 우리는 처음에 집결했던 학교 운동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다른데로 팔려간(?) 학우들의 모습은 아직 보이질 않았습니다.

얼마 후 벼를 세우고 돌아온 학우들의 모습은
마치 갯펄에서 레슬링을 하고 온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엉망이 된 옷차림과는 반대로 그들의 얼굴은 보람에 찬 얼굴이었습니다.
수해 당한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 한 사람에게는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 일이 제일 힘든 것 같았는데 그들을 보니 우리의 일은 그래도 수월했던 듯 싶었습니다.

상황이 어려운 지역이라 식사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소금으로 간만 맞춘 주먹밥이라 할지라도 감지덕지해야 할 상황이였지만
비싼 김치에 뜨끈뜨끈한 식사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서로들을 대견하게 바라보았습니다.
뜨거운 동지애(!) 때문인지 몰라도 물을 마셨는데도 자꾸만 목이 메어왔습니다.

군인들이 운동장에 막사를 만들 즈음 우리는 차에 올랐습니다.
우리는 오늘 하루 왔다가그냥 가지만 저 군인들은 얼마를 더 있어야 할까 생각하니
저들 중에 있을 나의 아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렇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려 오는 사랑하는 가족을,
그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어떡하나? 하고 생각하니 가슴은 더 미어졌습니다.
하천 군데군데 영문도 모른 체 실려온 집체만한 바위들이 산 뒤로 사라져갔습니다.
아름다운 지리산 자락 한 모퉁이 마을은 그 여름의 악몽들을 떨쳐냈는지
어스름한 밤 안개 속에서 숨을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주님의 요청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할 수 있는
나 자신의 지극히 작고도 엉성한 충성을 확인하고 갈 뿐이었습니다.

고통중에 있는 수재민들에게 우리 주님의 자비하심이 날마다 더하기를 기도합니다.


218.54.8.150오덕호: 은혜로운 글이었습니다. [09/07-09:21]

211.223.163.126백계환: 수재현장에 계시는 주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글이네요. [09/18-09:15]
210.102.252.16양병섭: 따스한 마음이 스며옵니다. [09/19-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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