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성경공부

제32과 바울과 바나바의 갈라짐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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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덕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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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에서 결정된 내용을 편지로 받고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해설: 기뻐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교회의 결정이 이방인 교회에 크게 유익한 것이었음을 암시합니다. 동시에 이 모습은 안디옥교회의 겸손함도 보여줍니다.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에 모인 교회지도자들의 결정을 겸손하게 그리고 기쁨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2) 예루살렘교회는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으로 갈 때 누구를 같이 보냈습니까? 그들은 그곳에서 어떤 사역을 했습니까?

해설: 유다와 실라를 같이 보냈습니다. 본문에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으나 암시된 내용을 볼 때 그들은 예루살렘교회에서 파송된 사람으로서 안디옥교회에 대한 예루살렘교회의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고 또한 예루살렘교회의 결정사항을 보증해주는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교회의 자상한 모습을 볼 수 있고 또한 일을 정확하게 처리하려는 노력도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유다와 실라는 자기들이 받은 은사로 안디옥교회를 잘 권면하여 많은 은혜를 끼쳤습니다. 이 모습은 단순히 편지만 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교회를 섬긴 모습입니다. 이것은 전에 스데반이 재정관리자로 뽑혔지만 큰 능력으로 복음을 전한 것과 비슷합니다.

3) 유다와 실라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실라는 바울과 같이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이렇게 되었겠는지 한번 추측해보십시오.

해설: 실라는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와 바울의 선교여행에 참여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실라가 이방인 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실라가 이렇게 된 데 영향을 미친 것은 크게 세 가지일 것입니다. 첫째는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회의이고, 둘째는 안디옥교회를 방문한 일이고, 셋째는 바울과 바나바와 가까이 동행한 것입니다.

실라는 예루살렘교회의 회의에 참석한 동안 바울과 바나바가 보고한 선교활동을 듣고 많은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또한 잘못된 교훈에 어려움을 겪는 이방인 교회를 돕는 것과 이방인 선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어느 정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안디옥에 가서 이방인 교회를 섬기며 이방인 선교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동안 바울과 바나바와 동행한 것도 이방인 선교의 중요성을 배울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실라는 일단 예루살렘에 돌아갔지만 다시 안디옥으로 가서 바울과 함께 선교여행을 떠나게 된 것 같습니다.

4) 바울과 바나바가 전에 선교한 교회를 다시 방문하자고 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해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선교는 한 번 말씀을 전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돌보며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선교한 다음에 다시 그 교회를 방문하여 교회가 계속해서 잘 성장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5)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의 문제로 다투었는데 두 사람의 입장에서 각각 긍정적인 모습은 어떤 것인지 찾아보십시오.

해설: 바울이 마가를 데리고 가지 말자고 하는 것은 마가가 전에 선교사역 중간에 돌아갔으므로 다시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차질이 있을까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를 징계함으로써 그가 바로 서도록 돕는 의미도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바나바의 입장에서는 한번 실수를 했다고 심하게 징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 것 같습니다. 바나바가 보기에는 마가가 이번에는 잘할 것 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입장은 바나바의 입장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가지지 못하였고 바나바의 입장은 바울의 입장이 가진 장점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이 두 입장 중에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하냐 하는 것은 마가에 대한 평가 중에 누구의 평가가 더 옳으냐에 달려 있습니다. 마가를 성숙하게 본다면 바나바가 옳고 마가를 미숙하게 본다면 바울이 옳습니다. 그러나 마가가 미숙하다고 하더라도 크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다시 데리고 갔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을 볼 때 마가의 잘못이 여러 번 반복된 것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나중에 마가는 훌륭한 일꾼으로 성장한 것을 볼 때 여기서는 바나바가 더 잘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6)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진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가) 위대한 사도가 다투고 갈라진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해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갈라진 것이 기본적으로 잘한 것인가 잘못한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진 것은 기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평화롭게 의논해서 갈라진 것이 아니라 다투고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갈라진 사실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갈라진 동기입니다. 마음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투고 갈라졌으므로 잘못한 것입니다.

나) 이것이 잘못된 행동이라면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해설: 위대한 사도도 실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견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다투고 갈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사도들의 행동이라고 무조건 따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인간이었으므로 그 행동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평가해보고 모범적인 행동일 때만 따라야 합니다.

다) 갈라진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해설: 두 사도가 나뉘었으므로 선교사역의 힘이 적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실라와 같이 사역하면서 별로 위축되지 않고 사역한 것을 볼 때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반면에 선교 팀이 둘이 되어 선교사역이 더 활발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라) 갈라져서 나타난 긍정적인 모습이 갈라진 것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까?

해설: 그럴 수 없습니다. 잘못은 아무리 그 잘못으로 좋은 결과가 초래되어도 잘못으로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룟 유다는 자기 욕심으로 예수님을 배반하여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온 세상을 구원하는 선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렇다고 가룟 유다가 잘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는 악한 마음으로 악한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 악행을 선하게 이용하신 것뿐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악한 동기로 한 행동이 선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그 행동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마) 올바르게 갈라지는 방법도 있습니까?

해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보다 효과적인 사역을 하려고 갈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때는 서로 화목하고 격려하는 가운데 갈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서로 협조해야 합니다. 인간의 욕심이나 주장 때문에 갈라져서는 안 됩니다.

7) 우리도 선교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경험을 통해 선교에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까?

해설: 실라가 겪은 일과 비슷한 경우를 들자면 다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선교사의 보고를 듣는 중에 선교의 중요성을 깨닫고 선교의 열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혹은 단기선교 등을 통해 선교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8) 우리의 선교나 전도는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하는 사역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런 사역이 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9) 우리는 어떤 이유로 많이 갈라집니까?

해설: 교회의 역사를 볼 때 교회가 갈라지는 것은 대체로 외적인 명분은 교리의 차이이고 실제적인 이유는 교권다툼이라고 많이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권력을 얻기 위해 다투거나 자기의 주장을 펴기 위해 갈라지는 일은 피해야 하겠습니다.

10) 연약한 사람이나 실수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바람직합니까?

해설: 그가 잘못을 깨닫고 고치려고 한다면 굳이 징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격려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다만 그 사람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공정한 징계를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가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는 징계를 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잘못에서 벗어나 회복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징계의 목적은 항상 그 사람을 파멸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며 회복시키는 데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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