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과 바울의 회심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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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덕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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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본문의 중요한 등장인물을 두 사람 든다면 누구를 들 수 있습니까?

    사울과 아나니아입니다.

2) 사울(바울)을 하나님께서 그 동안 준비시킨 것을 우리는 전에 살펴봤습니다. 그렇게 준비시킨 사람이 오늘 본문에서 드디어 회심하게 됩니다.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자 하나님은 바울을 변화시켜 본격적으로 쓰십니다. 그 동안의 모든 모습은 그를 준비시킨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소원이 성취되지 않거나 우리 주위 사람이 변화되지 않아도 실망하지 말고 기도하며 노력합시다. 하나님의 시간에 성취될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복음송가를 아십니까? "주님의 시간에 주의 뜻 이뤄지리 기다려..."

3) 바울이 여기서 겪은 체험을 설명해보십시오.

    신비한 빛을 보았고, 신비한 음성을 들었으며, 눈이 멀었다가 나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주님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덧붙여 자기에 대해 명령을 받았다는 성도도 만났습니다. 이런 체험은 놀라운 경험이었고 사람들이 흔히 겪는 체험이 아닙니다.

4)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바울이 이런 놀라운 체험을 한 것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회심하여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것이 중요합니까?

    물론 변화가 중요합니다. 사실 체험은 변화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변화하지 않으면 체험은 무의미합니다. 만일 체험과 변화 중에 하나를 택한다면 변화를 택해야 합니다. 체험이 없어도 변화하는 것이 체험은 하고 변화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5) 우리 주위에 종교적인 체험을 많이 자랑하지만 신앙생활에 별로 변하지 않은 사람들이 혹시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떤 것을 더 사모합니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종교적 체험을 합니다. 혹은 예배나 기도회에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이런 것은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신앙생활의 성장을 위한 도구들입니다. 아무리 종교적 체험이 많아도 신앙생활은 성장하지 않아 여전히 화를 잘 내고 추한 말을 한다면 그런 체험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야고보서 1:26을 보십시오. 우리는 체험이나 감정보다 내적인 신앙과 외적인 삶이 변화되는 것을 더욱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 1:26)

6) 바울의 변화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바울에게서 가장 큰 변화는 예수님을 부인하다가 메시야로 인정하고 믿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신앙의 변화는 바울을 철저히 은혜를 의지하는 참된 신앙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바울은 어떤 구원관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예수님을 믿기 전에 바울은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은혜에는 감사했으나 구원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율법을 잘 지킴으로써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나)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바울의 심정을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이 자기가 가진 율법과 종교의 가르침을 통해 최선을 다해 내린 결론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하나님을 위해 예수님의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의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열성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하나님이 강제로 자기를 바른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가 변화되고 구원받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 바울은 과거 자기의 종교적 의를 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모두 배설물로 여기고 해로 여깁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 의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빌립보서 3:7-9를 읽어보십시오. 이 본문에서 바울이 배설물로 여기고 해로 여긴 것은 단순히 세상의 명예만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의까지도 그렇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의를 자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종교적 의를 조금씩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신앙생활을 잘한 사람이 더욱 주님의 은혜에 의지합니까, 실수를 한 사람이 더욱 의지합니까? 누가 더 교만합니까?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교만해지고 마치 그것으로 인해 구원에 가까워진 것처럼 생각하다가는 예수님의 은혜를 약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종교적 의를 오히려 해로 여기며 예수님의 은혜만 의지하는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에서 철저한 은혜주의(복음주의)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 3:7-9)

7) 예수님을 만나고 다메섹으로 들어온 바울이 어떻게 지냅니까? 여기서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바울은 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합니다. 자기가 한 행동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었음을 알고 너무나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가 와서 복음을 전하자 믿고 세례를 받은 후 곧 음식을 먹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받으면 어떤 죄에서도 해방되고 어떤 좌절에서도 희망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8) 아나니아는 주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처음에는 바울에게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교회를 박해하는 자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아나니아는 위험해서 가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나은 다음에 다시 교회를 박해할까봐 두려워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갑니다.

9) 아나니아의 모습을 보면서 그와 반대되는 행동을 했던 구약의 인물이 생각나십니까? 누구입니까?

    아나니아의 행동은 요나의 행동과 반대되는 것 같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위험과 증오심 때문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징계를 받고야 가게 됩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후 순응하여 갔습니다. 아나니아의 순종은 주님의 위대한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10)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체험과 변화 중에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교회에서는 어떤 사람을 더 높여줍니까?

11) 우리가 변해야 할 모습을 찾아보십시오. 특히 율법주의적인 요소를 버리고 은혜에 의지하는 신앙생활로 변해야 할 모습을 찾아보십시오.

12) 우리는 세상에서 실패하여 실망할 때가 있습니까? 주위에서 보거나 겪은 일들을 소개하고 어떻게 하면 회복할 수 있는지 나누십시오.

13) 주님의 말씀 중에 우리가 순종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는지 나누십시오. 그리고 아나니아의 모범에서 배운 것들을 우리도 이행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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