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관계적=본질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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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너무 오랜만에 들어와 글만 올리고 갑니다...부족한 글입니다..글이 길어서 죄송합니다.
이 글은 수정이 필요한 글입니다..
=다음 카페 [호산나 마을]=

***[삼위일체 관계적 본질적 통합]***

예수는 사람인가? 하나님인가?
그 답은 삼위일체 동등의 신학이나 혹은 양태론으로는 풀 수 없다.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해서 양태론을 이단으로 정죄한다.

사실상 동등으로 이해하는 것이나 양태론으로 이해하는 것이나 예수를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나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 그 모두가 오류이다.

이를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자
신약에 삼위로 나타나기 전에 삼위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가? 우리가 구약시대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으로 말할 것이다. 성부는 영이시다. 그리고 성령도 영이시다.

이렇게 성부 하나님도 영이시고 성령도 영이라는 사실은 예수가 육신을 입고 오시기 전에 그는 영(말씀)으로 존재한 것이다. 만약에 예수가 오시기전 어떤 존재였는가? 라고 말한다면 아버지의 품속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내재적) 아버지가 영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은 분명히 그 품속에 있었던 예수도 영으로 존재했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입증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영으로 존재한 하나님의 본체에서 분리되어 세상에 온 것이다.
그 [영이신 성부]에서 분리된 [같은 본질의 영이신 예수(말씀)]는 바로 세상에 올 때에 육체와 혼을 입고서(취하고서) 참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도 우리와 같이 [영혼과 육]으로 존재하지만 육체를 입고 온 그의 [영=말씀]은 바로 [영이신 성부하나님]에서 분리된 것이다. 예수의 [육]은 물질적 요소이며 예수의 [혼]도 하나님의 본질인 영은 아니다. 그러나 [영혼육]으로 존재하는 예수는 [영혼육] 중에서 [영]은 바로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성경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본체에서 분리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리고 그 본질은 [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체에서 직접 분리된 하나님의 아들의 [영]은 그가 하나님이 되시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리고 그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성경은 증거 한다.
이는 사람으로 나타났다가 아니라 분명히 사람의 모양이라고 말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즉 그가 사람으로 왔으나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영)으로써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을 취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그가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의 [영혼육] 중에서 [영]만큼은 말씀이신 하나님이시다. 예수의 [영]은 바로 모든 천사와 그리고 모든 사람의 영혼과 구별되고 구분된다. [말씀이라는 영]으로 존재한 예수가 [아버지라는 영]안에 있었다가 세상에 그 [영인 말씀]이 사람과 같은 [혼과 육]을 취하고 세상에 온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예수의 [육]은 마리아를 통해서 왔으나 예수의 [영]은 창조되지 아니하고 성부이신 하나님의 품속에서 온 [영(말씀)]이시다. 삼위는 과거 사실상 영으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삼위의 동등을 말하면 세 영이라는 삼신론이 된다.

분명한 것은 구약과 그리고 창조 이전에 삼위의 본질존재는 [영]으로써 있었다는 것이다. [성부도 영]이고 예수는 그 [성부의 영(말씀)]으로써 이었다. 당연히 성령은 영이라는 것에는 의심이 없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세 영을 삼위일체인 동등으로 보면 삼신론이 되기 때문에 동등보다는 관계적으로 이해해야한다.(유기적)

이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세 영으로 있었으나 [성부와 성부의 말씀과 성부의 성령]으로 구분해야 한다.[성부는 영]이시며, 그 영이신 성부의 [영이신 말씀]과 영이신 성부의 [영이신 성령]이 있다. 이렇게 구분하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그 순서는 성부가 처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등을 말하면 영이신 삼위이기에 삼신영이 된다. 그러므로 이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동방교회는 성부 중심으로 나타난다. 매우 성경적인 것이다. 관계적으로 보아도 성부의 위치가 앞선다. 그리고 성부에서 성자와 성령이 파송된 것이 사실이다.

삼위동등의 신학을 지키기 위해서 본질이 같고 동등하다는 주장으로 삼위일체를 만들었지만 삼위를 영적인 존재로 이해하면 본체적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기초로 삼위의 영들을 이해해보자.
사람과 하나님을 비교하면서 이해하면 쉽게 이해가 갈 수 있다.
영혼육의 구조로 된 사람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영혼육]과 하나님의 [삼위]가 서로 닮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영은 [성부]를 사람의 혼은 [성령]을 사람의 [육]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왜 그런가? 영이 모든 마음의 생각을 결정한다. 그 생각을 혼이 일하고 육은 최종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이러한 것은 예수가 세상에 올 때도 삼위의 역사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성부가 결정하고 계획하고 약속했다. 성령은 예수를 보내기 위해서 마리아에 잉태하는 일을 능력으로 행한다. 그리고 예수는 순종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왔던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영의 깊은 마음의 결정 즉 그 마음의 생각을 통해서 사람의 혼이 일하고 육이 움직이다. 이렇게 사람(영혼육)과 같이 하나님(삼위)도 일한 것이다. 예수가 육으로 온 것은 사람의 육체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육체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즉 육체로 죽고 영원한 육체를 입어서 부활하는 것이 그분의 일이었다는 것이다.

만약에 혼이 문제가 된다면 성령이 이 땅에 왔을 것이다.(가상추측) 이와 같이 삼위에서 최종적인 순종을 한 주체는 예수라는 것이다. 성부의 뜻대로 그가 일한 것이다. 성부는 뜻이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를 보내시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성령으로 세상에 예수를 태어나게 하는 일을 하시고 예수는 순종하였던 것이다.

또한 삼위에서 성부와 성령은 영으로써 변동이 없었고 변함이 없었다. 서로 깊이 연결된다. 이 같이 사람도 영과 혼이 분리되는 것보다는 세상에서 보통 분리하여 말하지 않고 [영혼]으로 일체 시켜서 말한다. 살아있는 사람이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영혼]으로 가듯이 삼위의 [성부와 성령]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성부와 성령]이 사람의 영과 혼과 같다. 영의 뜻대로 혼이 움직이고 또 혼이 하는 대로 육이 일한다. 이와 같이 서로 연관되어서 일한 것이다.

성자인 영이 육체로 왔다는 것은 우리의 육과 깊이 연관된다. 성자인 영이 삼위에서 육체와 같은 위치와 역할이라는 것이며 그가 세상에 육체를 입고 온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 중에서 성부가 사람의 영과 같이 모든 결정의 원천이고 성령은 그 결정을 수행하는 것이며 성자는 그 일을 위해서 순종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삼위의 관계는 완전하다.

사람의 영이 생각하고 그 생각을 혼이 능력으로 일하면 육이 움직이다. 이러한 사람의 관계는 하나라는 것이다. 마음으로 결정한 것을 혼이 일하지 않고 육은 놀고 있다면 이는 사실상 정신이상자이다. 완벽한 본질이 일체이며 일하심도 일체인 삼위라는 것이다.

그리고 삼위를 두고서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 또 성부만을 두고서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이나 성자를 두고서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성부의 아들] [성부의 성령]이기에 성부를 배재하고 아들을 독자적으로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이나 성부를 배재하고 성령을 독자적으로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이 관계 면에서 어렵다는 것이다. 성경대로 성부는 변함이 없으시다. 유일하게 홀로 영광을 받는다.

그러나 성령과 성자는 홀로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체송이나 삼위송은 문제가 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삼위를 독립해서 찬양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성자나 성령은 아버지의 아들이며 아버지의 영이기에 아버지가 영광을 얻도록 일한 것이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은 아들과 함께 사람들로부터 영광과 찬송을 받으신다. 즉 하나님 안에서 아들이 영광을 받는 것이지 아들이 독자적으로 영광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은 독자적으로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분명하다.

아들이 세상에 있을 때 하나님은 홀로 영광을 받으셨다. 사람들의 영광의 찬송과 경배를 성령으로 하나님께 올린 것이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아들도 성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이와 같이 성부는 아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영광을 얻으셨다.

아들이 사람들로 영광을 받고 또 찬송을 아버지와 함께 받는 것과 그리고 세상에서도 동방박사가 경배하고 그리고 천사들이 절했다는 것은 그의 위치가 하나님의 본체적인 본질적 위치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성부로부터 온 하나님의 아들로써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는 모든 존재와 구별되고 구분된다. 그는 모든 천사와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는 위치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위치는 아니다. 성령은 모든 영들을 복종시킨다. 그러나 독자적으로 일하지 않는다. 반듯이 성령과 성자는 아버지의 뜻대로 일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예수는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는 이유는 사람들과는 구분된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사람에게 경배와 찬송을 받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는 달랐다.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신 말씀인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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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글]
서방교회는 삼위일체로 먼저 출발한 삼위 하나님을 배운다.(관계적 약화)
즉 삼위는 일체 라는 동등의 신학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서로 본질이 같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을 하면서 의문을 갖게 되면 대부분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로 발전한다.

혹은 처음에는 양태론으로 이해했다가 후에 삼위 동등의 신학을 배워서 수정하는 것이 있다. 문제는 수정하지 못하면 양태론으로 남아야 된다는 것이다. 또 양태론으로 이해한 자가 신학을 하지 못하면 그대로 양태론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아버지가 직장과 집에서 다르지만 한 분이라는 이해 등=이단으로 보는 것은 무리)

이렇게 출발한 것과 달리 경륜적으로 출발한 동방의 신학이 있다. 동방의 신학도 삼위일체를 주장한다. 이 신학의 위험요소는 예수를 사람만으로 만들어 버리는 오류를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흐름을 피하는 것은 내재적 하나님과 경륜적 삼위를 연결시킬 필요가 있다. 서로 통일되고 서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예수의 문제)

그 중에 가장 큰 걸림돌은 예수의 문제이다. 예수가 사람인가? 혹은 하나님인가? 라는 문제는 반듯이 해결해야 되는 문제로 나타난다. 서방신학으로 나아가면 예수를 하나님으로써 강조하는 것이며 동방의 신학으로 나아가면 예수를 사람으로 강조하게 된다.

그래서 본인의 방법은 예수를 두고 연구한 결과 예수를 양성과 인성으로 구분해서 이해하는 것보다 예수의 본질이 두 부분으로 구분하면서 이해한다는 것이다.(이원론)

예수의 [영혼육]을 구분해서 예수가 사람이 되기 전에는 즉 내재적 존재로 있을 때는 [영]으로만 있었다. 그리고 경륜적으로 존재할 때는 [영]이 [혼육]을 취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육은 근본 신의 본질은 아니다. 그리고 혼은 신의 본질보다는 신의 생명의 기이다. 그러나 예수의 영은 신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신의 본질을 논하는 것에서 예수의 본질을 논하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도 존재의 본질적 구성인 삼위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이해하듯이 예수의 이해도 예수의 본질적 구성요소인 영과 혼과 육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두 관계를 연결하면 된다. 즉 삼위와 영혼육을 연결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제는 삼위일체 이해도 서방의 이해보다 먼저 내재적 하나님과 경륜적 삼위를 이해하기 위해서 서로의 관계적인 입장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그 관계는 적극적으로 경륜적인 삼위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관계가 분명히 정립되면 내재적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이해해야한다. 그리고 그 중심은 내재적 존재의 본질은 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삼위 경륜적 하나님도 그 본질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예수의 문제이다. 예수가 사람이기에 본질이 변한 것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을 끌어내리는 결과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예수도 내재적인 영과 지금의 영이 같다는 것이다. 다만 육신을 취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혼과 육)

신약에서는 삼위의 관계가 충분히 설명되고 내재적 존재와 관계를 알 수 있게 한다.
복음도 신약에서 출발해서 구약을 깊이 이해하듯이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이렇게 이해해야 마땅하다. (삼위의 관계 적인 이해에서 구약의 내재적인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

결과적으로 예수를 하나님으로 또는 사람으로 또는 양성으로 만들어도 구원에 문제가 있을까? 이러한 이해는 사실 이단이 된다고 까지 볼 수는 없지 않을까?

본인은 사실 위의 삼위일체의 과정을 겪었던 것 같다.
신학을 하기 전에는 쉽게 양태론으로 이해했고 또 보수신학을 하면서 삼위동등의 신학으로 이해하였고 그후에 동방의 삼위일체 신학으로 발전했고 동방신학이 성부와 예수에 대해서 분리시키는 경향으로 말미암아 사람으로만 집중하면서 본인도 예수를 하나님이면서 사람이지만 사람의 입장을 더욱 강하게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 신학으로 말미암아 관계적 그리고 본질적 이해로 새롭게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동방교회 삼위일체 신학의 이해에서 서방교회의 삼위신학으로 이해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먼저 관계를 설정하는 동방에서 출발해서 본질을 일체 시키는 서방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으로 이해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신약에서 구약으로 경륜적 이해에서 내재적으로 이해)

문제는 여기에 이르기까지 앞서 주장되었던 신학을 거의 이해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상 서방교회의 삼위일체신학이라는 것으로 이단을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모두의 신학을 접해도 그 함정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태론, 동등의 신학, 동방의 삼위이해 등 그 모두가 오류는 있으나 이단으로 몰아버리는 것은 큰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와 다르면 모두 이단이라면 구원은 사실상 신학으로 결정되게 된다는 것과 같다. 물론 이러한 신학을 통해서 극단적인 이단이 나온 것은 사실이다.
예수가 영으로 부활을 했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그 외에는 이단의 정죄보다 학설과 학문으로 이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냉정하게 내재적 존재보다 삼위관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 삼위관계에서 내재적 존재를 바라보는 것이 더 요구된다. 그리고 예수를 경륜적인 것과 내재적인 것으로 연결하는 작업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내재적인 것은 영(말씀)으로써 아버지 품속에 존재했으며 경륜적인 것은 그 말씀이신 영이 혼과 육을 입고서 즉 육신을 입고서 세상에 왔다는 이해이다.

이렇게 삼위일체와 예수를 분리해서 이해한 신학에서 이제는 서로 연결하는 신학으로 나타나야 한다. 즉 예수를 독자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성부 하나님의 본질이 있으며 동시에 우리와 같은 본질인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 삼위를 신약성서에서는 하나님으로 총칭하지 아니하는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만약에 삼위를 두고서 하나님으로 말하면 동등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약성서 어디에도 삼위전체를 하나님으로 부르지 않는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서방신학에서 삼위송 각각을 부른 행위 그리고 하나님=삼위라고 부르는 것은 이미 경륜적으로 나타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경륜적인 관계를 반듯이 설정할 때는 성부가 하나님이시며 성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다.

그리고 독자적으로 설명할 때는 성부만 변함없이 그대로 하나님으로 사용되고 성자는 우리 주 그리스도로 혹은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나타난다.
삼위가 항상 관계되기에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성부가 취하고 있다.

그렇다고 성자와 성령이 그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연결되면서 이해된다는 것이다. 우리와 연결될 때는 우리의 주가 되시고 하나님과 연결될 때는 하나님의 아들로 있다. 예수는 사람과 하나님과 직접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그가 사람이기에 우리와 연관되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하나님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그의 영은 하나님과 연관되고 그가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와 연관된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을 중보하는 구조로 사람을 취한 것이다. 참으로 우리의 중보자 예수이며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두 가지가 있기에 그는 하늘의 하나님과 땅의 사람들을 중보하는 일을 감당한다.====

예수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보면 먼저 예수의 영과 사람의 영은 같은 영이라는 것은 사실이나 그 본질은 다르다는 것이다. 예수의 영은 천사의 영과 다르고 사람의 영과 다르다. 예수의 영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온 본체의 영이다.

성부도 영이시다. 그 영과 사람의 영은 같은 영적인 것이다. 또 천사와 같은 영적인 것이다. 그러나 또한 전혀 다르다. 하나님의 영은 무한하고 영원하며 모든 것을 아시고 모두를 다스리는 절대적인 위치이다. 그러나 다른 영들은 하나님 안에서 다스림을 받는 영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영 즉 천사들은 하나님의 군대이며 백성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같은 자들이었다.

성경은 사람을 신이라고 말한다. 즉 영적인 존재란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천사와 같이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아들이 되는 것은 육체 때문이 아닌 영이 있기에 가능하다. 즉 모든 영혼의 아버지이다.

그런데 그 영혼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죄를 짓자 결국은 아버지를 떠난 것이다. 그래서 그 아들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참아들인 맏아들로 예수가 세상에 온 것이다. 모든 아들들보다 먼저 나신 그가 세상에 임한 것이다.

천사는 하나님의 아들들보다는 부리는 영으로 이해해야한다. 그리고 사람들도 본래 하나님의 아들들보다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에게 참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준 것이다.(양자) 지금 예수와 상관없는 사람들도 사실상 마귀에 사로잡혀있는 자들이다.

성경은 본래 사람은 하나님의 종인데(청지기) 그들이 마귀를 따라서 마귀의 종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 예수로 말미암아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양자)과 사람의 아들들이 구분된다. 그리고 그 사람의 아들들을 성경은 마귀의 자녀라고 영적으로 지칭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인 아담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참아들 예수는 이렇게 떠난 자들을 찾기 위해서 세상에 온 것이다. 그리고 아들예수로 사람을 아들 삼게 된 것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다. 아담으로 모든 자들이 오고 그리고 죄가 와서 모든 사람을 사망으로 인도했다. 예수도 둘째 아담으로 오고 모든 자들에게 육체의 죄를 그치게 하는 죽음을 행하시고 그는 하늘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을 하나님은 양자로 삼는 것이다.

사람과 동물을 비교하면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다.
동물을 보면 혼과 육으로 구분된다.
동물은 혼이라는 본능적인 요소에 의해서 육이 움직이다.
물론 동물을 통제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영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만약 동물에게 영이 있으면 사람이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동물은 사람보다 아래이다.
하나님은 동물을 직접 다스리실 수 있지만 사람에게 맡긴 것이다.

이는 마치 사람과 동물의 관계가 예수와 성도의 관계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담이 모든 동물을 다스리도록 창조되었듯이 아담이 실체인 예수는 모든 성도들을 다스리는 것이다.(사람의 왕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서 모든 곳에서 임금이다)

가상적인 비유를 한다면
본래 사람은 동물을 다스리고 동물은 다스림을 받아야 되는 관계였다.
그런데 사람이 동물들을 다스리려고 하자 동물들이 사람을 거역하고 대적한다.
사람과 같이 되려는 오만한 동물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동물들은 스스로 살게 되는 야생미 같이 사납고 잔인한 존재가 되었다.
이 때에 사람은 그 동물들이 불쌍해서 동물들을 위해서 여러 방법을 사용했지만 모두 실패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사람이 동물이 된다. 사람이 동물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동물과 같이 되기 위해서 동물의 가죽옷을 입고 동물들이 먹는 것을 먹으면서 마치 동물들과 같이 행동한다. 어느날 사냥꾼이 오자 동물로 가장한 사람은 사냥꾼을 이기었으나 그는 죽고 만다. 이를 본 동물들은 사람이 동물을 위해서 희생한 것을 그때야 깊이 깨닫고 더 이상 사람을 대적하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가까이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위험한 곳에 다시는 오지 않았다... 이상은 하나의 비유이다.

창조세계에서 사람과 동물의 관계가 보여주는 것은 위와 같은 수직관계이다.
죄가 들어오자 왜 동물들이 사람을 떠나 야생으로 돌아갔고 사람을 대적하고 사람들을 떠났는가? 또 동물들이 사람을 경계하고 덤비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죄가 들어와서 본래적인 수직 지배관계가 깨어진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 동물은 사람에게 순종하고 사람은 다스리는 것이 본래적인 질서창조의 질서였다. 바로 그 질서가 죄가 들어오기 전에 창조 때의 본래적인 질서라는 것이다. 사람이 위의 질서인 신을 거역하자 사람의 아래인 동물들도 거역한 것이다.(교훈)

성경에서 이사야서에 사자들이 어린이와 뛰놀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그 예언은 바로 우리와 동물의 현재 상태를 뒤집는 관계이다. 이는 바로 창조의 본래적인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세상에 죄가 들어온 무질서의 관계가 이사야서의 내용과 같이 회복된다는 것은 사람들과 그리고 하나님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왜? 동물을 사람에게 다스리라고 했는가? 그것은 동물과 사람은 다르기 때문이다. 구분된다는 것이다. 동물의 혼과 육은 같은 종류이나 동물에게는 영이 없다.
그래서 사람은 영이 있기에 동물을 다스리는 자격이 있는 것이다. 즉 동물이 혼과 육이 없지만 영을 가진 사람에게 통제되고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영과 구분된 하나님의 말씀(영)이 사람의 육신을 입고 왔다는 것은 그가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는 자격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영혼육과 예수의 영혼육이 같은 것 같으나 다르다. 어떤 면에서 다른가? 예수의 영과 우리의 영은 다르다.

예수의 영은 하나님의 본체의 영이다. 그러나 우리는 본체의 영이 아니다.
같은 사람이지만 성경이 예수만을 하나님으로 증거 한 그 이유는 영의 출처가 다르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예수는 모든 죽은 자와 산 자보다 먼저 부활하셨다.

아담이 인류의 대표가 되듯이 예수가 마치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의 주가 되실 수 있는 왕권을 부활로 얻은 것이다. 그의 부활은 사람들 중에 먼저 부활함으로 모든 사람이 그에게 복종할 것이다. 그에게 모든 세계의 존재들이 복종해야 되는 이유가 먼저 부활한 것이다.

하늘의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인 [영]을 소유하고 계시고 또 그는 하나님의 본체의 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에 여전히 천사들을 부릴 수 있는 것이다.(실재로 공관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는 하늘의 12영을 불러서 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군병들에 잡히시던 때에 하신 말씀이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사람보다 먼저 죽은 자 가운데 먼저 부활했음으로 모든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는 왕권을 부활로 하나님께 얻은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사람의 [영]이라는 위치가 [혼과 육]을 다스릴 수 있는 근본적 위치이다.
영이신 성부는 하늘의 존재와 땅의 존재 그 모두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영이신 성부는 하늘의 천사와 땅의 사람들 모두를 절대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분이다.
그 방법이 아들과 성령으로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내 영이 내 혼을 통해서 내 육을 움직여서 땅의 동물들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내 영이 내 혼을 통해서 내 육을 움직여서 하늘의 새들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성경은 하늘을 사람들에게 다스리라고 명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들에게 땅만을 다스리리라고 말하였는가?

그 이유는 실재 하늘의 세계는 이미 평화의 상태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상징적으로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땅을 다스리도록 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그 땅은 사람이 오기 전에 이미 사탄이 다스리고 있는 세계였다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사람에게 땅을 다스리라는 것은 바로 이 땅 곧 공중권세를 가진 사탄대신 임명한 자가 사람이었다.

사실 성부는 모든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하늘에서는 사탄이 패하고 땅에 떨어져서 이미 평화가 되었지만 우리가 사는 이땅은 사탄이 와서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은 사람이 실패하자 하나님은 예수를 세상에 보낸 것이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사탄을 물리치고 이긴 것이다. 그 최후는 재림으로 끝난다.

재림의 때는 하늘도 평화이며 땅의 평화가 될 것이다. 그 때에 다스리는 것은
마치 성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로 세상의 존재를 다스리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성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로 하늘의 존재를 다스리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성부는 하늘의 세계와 땅의 세계를 모두 다스리기 위해서 땅이라는 지상에 있는 사탄과 싸우도록 사람을 창조한 것이다. 이것이 실패하자.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사탄과 싸워서이기고 사탄이 다스리는 지상을 기업으로 상속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지구는 사실상 온 세계 즉 하늘의 세계와 땅의 세계의 모형이다.
그리고 아담은 예수의 모형이며 아담의 후손은 이 땅을 다스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실패하자 실재인 예수가 대표가 되고 우리는 예수의 영적인 후손이 된 것이다. 교회는 바로 장차 이 땅을 상속받을 것이다.

하늘의 태양은 하늘의 빛을 의미하며 밤이 있다는 것은 이 땅의 어둠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청각이었다. 이 세상은 그렇게 하나님의 대 역사를 위해서 창조된 것이다.==

*천사와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청지기와 같은 종이었습니다.

천사는 하늘에서 사람은 땅에서 그러한 위치입니다.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타락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자 되어 온전히 구원된 우리가 다시 타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천사는 성경에서 부리는 영으로 묘사합니다. 아들과는 다른 위치입니다. 하나님의 군대와 심부름을 하는 자들입니다. 아들의 역할이 아닙니다.

또 성경은 성도들을 위해서 그들이 일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천사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천사는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합니다. 보배피로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을 부리는 것은 아들의 권한입니다.

예수가 천사들을 부리셨다는 것은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종의 위치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종보다 나은 즉 천사보다 나은 자들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로 누리는 자들입니다. 고귀한 신분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참 아들인 예수로 성도가 양자 된 아들들이 되었기에 이 땅에서 우리가 천사보다 나은 자들입니다. 이 땅을 상속하여서 누리는 것은 천사에게는 없습니다.
천사는 맡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들들로 세상에서 이 땅을 유업으로 얻어서 하늘의 하나님과 아들 예수로 다스립니다.

예수가 세상에 오는 것은 바로 세상을 그가 상속받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자기 것으로 알고 있었던 반역자 사탄을 불못으로 집어넣고 심판을 끝냅니다. 우리들에게는 새 육체를 입혀서 새 세상에서 영원토록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가 있는 이곳이 변혁된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과연 우리들은 하늘로써 오는 세계를 바라보고 사는 자들입니다.

천사들은 여전히 하늘의 세계에서만 있습니다. 과거 땅으로 내려왔던 사탄이 심판되어졌듯이 그 사탄들은 땅으로 오지 못하고 하늘에서 머물러야 합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여전히 하늘에서 일을 하듯이 영원히 하나님의 종 천사로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분은 천사보다 귀한 신분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아들 예수로 얻었습니다. 우리가 살 곳은 이 땅입니다. 영들이 있는 하늘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게 되는 이유는 창조 때에 사람에게 이 땅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였듯이 그와 같이 새 땅과 새 하늘이 이루어지는 이 지상세계에서 우리가 살 것입니다.

영원한 육체를 가지고 살 곳은 처음 것과 다릅니다.
모든 것이 영원한 것으로 바뀝니다. 시간의 정함도 없습니다. 영원으로 지속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되는 것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현 세상을 바라보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면 안됩니다.

하늘의 낙원과 그리고 장차 오는 세계를 그리워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천사가 하늘에서 산다며 우리는 땅에서 살 것입니다. 천사들이 없는 혼과 육으로 오히려 우리는 더 귀한 누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천사들을 성경은 하나님의 부리는 영으로 묘사하고 그리고 너는 내 아들이라고 천사에게 말한 적이 없다고 히브리서는 밝히 드러냅니다.

천사들이 부러워하는 자들이 우리들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러한 신분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은 결코 천사들이 따라갈 수 없는 신분입니다.
그것도 영원토록 얻은 신분이며 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영원한 신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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