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성경공부

제42과 죽음을 각오한 바울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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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덕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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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도행전 20:22에서 바울은 무엇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합니까?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행 20:22)

해설: 한글 개역성경에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되어 있으나 이 단어는 “심령”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성령”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는 성령에 매임을 받아 가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만일 이것을 단순히 바울의 마음의 문제라고 하면 나중에 두로의 성도들이 성령으로 인해 전해준 말씀보다 바울이 자기 마음의 결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이 되는데 이것은 부자연스럽습니다.

2)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 두로에서 이레를 유할 때 그곳의 성도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울에게 무엇이라고 권합니까? 이것은 사도행전 20:22와 어떻게 조화될 수 있습니까?

해설: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두로의 성도들이 하는 말은 바울의 말과 모순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모순 되는 말씀을 바울과 두로의 성도들에게 주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두로의 성도들이 받은 감동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가면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사도행전 20:23-24에서 한 말과도 통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을 것이라는 성령의 감동을 받고는 두로의 성도들이 바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권한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24)

3) 두로의 성도들은 누구를 데리고 와서 바울을 전송합니까? 여기서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해설: 처자를 데리고 와서 전송합니다. 여기서 성도들이 여성을 존중하고 아울러 자녀를 존중하며 그 신앙교육에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어린아이들을 무시했습니다. 이런 관습을 생각할 때 이렇게 여인과 자녀의 이야기를 특별히 기록한 것은 이들이 어린아이였음을 암시합니다.

4) 바울이 가이사랴에 이르러서는 누구의 집에 들어갑니까?

해설: 일곱 사역자 중에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갑니다.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이것을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이라고 기록하였으나 이것은 부정확한 표현입니다. 원래 헬라어에는 “집사”라는 단어가 없고 단지 “일곱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도 살펴봤듯이 일곱 사역자를 집사라고 표현하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서 빌립이 전도자로 불리는 것도 우리에게 교훈이 됩니다. 빌립은 재정관리자로 뽑혔었으나 교회가 흩어지면서 오히려 전도자의 사역을 더 많이 감당하여 결국은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환경이 바뀌어 자기의 직분을 감당하기 어려워져도 여전히 우리 모두는 전도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빌립은 이런 모습에서 우리의 모범이 됩니다.

5) 빌립의 집에 누가 있었습니까? 이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들의 모습은 본문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까?

해설: 네 딸이 있었는데 처녀이면서 예언자입니다. 이들이 특별히 예언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으나 이들이 예언하는 자라는 말은 아가보가 예언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증해줍니다. 왜냐하면 예언하는 네 명의 딸들이 아가보의 예언에 반대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딸들은 자녀 교육에 대해서도 교훈을 줍니다. 빌립의 딸들이 신앙 안에서 잘 자라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두로의 성도들이 처자를 데리고 바울을 전송나간 것과 잘 통합니다.

6) 아가보는 누구이며 여기서 어떤 예언을 합니까?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행 11:27-28)

해설: 아가보는 사도행전 11장에서 온 땅에 흉년이 들 것을 예언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진 유명한 예언자입니다. 그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리라는 것을 행동으로 예언합니다. 아주 인상적인 예언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받을 고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7) 아가보의 예언 후 바울 주위의 성도들과 바울의 대화를 정리해보십시오. 여기서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해설: 성도들은 바울을 말립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고 안전한 곳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라고 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들이 울어서 자기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꾸짖으며 자기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더 이상 바울을 말리지 못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그칩니다. 이것은 바울의 용기와 결단을 보여주고 성도들의 겸손함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미 성령의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고난이 있다고 하여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은 바울도 쓸데없는 위험을 피하며 지냈습니다(행 9:23-25). 그러나 이제는 성령님이 고난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됩니다. 이 때 성도들이 만류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성령의 지식에 따라 성령의 뜻을 거역하려고 하는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고난 받으려고 하시는 것을 반대한 베드로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바울의 확신을 알고 더 이상 권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성력을 거역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행 9:23-25)

8) 우리는 인간적인 감정에 이끌려 남에게 잘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한 적이 없습니까? 두로의 성도들과 가이사랴의 성도들은 그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는 바울을 말리지 않았습니다.

해설: 목사님을 아낀다고 목사님이 희생적으로 사역하는 것을 막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일일 것입니다. 멀리 심방을 못 가게 한다거나 강제로 쉬게 하려고 한다거나 하는 것이 이런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목사님이 과욕을 부리는 것을 줄이도록 권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므로 쉽게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막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유의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9) 우리는 자녀의 신앙생활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해설: 자녀의 신앙생활을 지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신앙의 모임에 참여하도록 돕는 것은 좋은 신앙교육에 해당될 것입니다.

10) 나에게 있어 바울과 같은 올바른 판단력과 용기와 신앙의 결단력이 필요한 경우는 어떤 때인지 생각해보고 올바른 결단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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