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기독교와 다원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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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기송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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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카나다 콩코디아대학 명예교수이신 오기송 박사님이 카나다 중앙일보에 이틀에 걸쳐 실은 글을 옮긴 것입니다. 원제는 '기독교와 다원주의'이고 부제는 이 사이트 운영자가 임의로 붙인 것입니다.

<특별기고>
CANADA KOREA CENTRAL DAILY
중앙일보 (2001년 10월 3-4일)
부제: 오강남, 「예수는 없다」와 오덕호, 「목사를 갈망한다」를 보고


오기송 박사
콩코디아대학 명예교수


필자는 요새 두 권의 책을 읽었다. 그 하나는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라는 책이고, 다른 하나는 오덕호 교수의 '목사를 갈망한다'라는 책이다. 두 저자는 똑같이 북미에서 박사(Ph. D)학위를 받았고, 왕성한 연구와 집필로 각자의 영역에서 나름대로 기여를 하고 있다. 오강남 교수(이하 오교수라 함)는 종교학과 교수이고, 오덕호 교수는 신학교 교수이자 목사이다(이하 오목사라 함). 필자는 이들과는 연구분야(정치학)를 달리 하므로 이런 글에 대해서 논란한다는 것이 보기에 따라서는 화사첨족(畵蛇添足)의 우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는 종교분야도 정치분야나 기타 분야와 동떨어진 고립존재가 아니라는 일반적인 견해를 같이 한다. 잘 알다시피 지금 분쟁과 살상을 계속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의 비극이나 북아일랜드의 구교와 신교간의 장기적인 갈등은 그대로 종교분쟁이자 정치적 문제인 것이다. 근일 전세계를 뒤집어 놓은 테러리스트들의 미국 심장부를 강타한 대참사도 이슬람교와 유관하며, 국내외 국제정치에 대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두 저자의 글을 함께 소개하는데는 지금 한국교계에 흐르고 있는 소위 근본주의적 경향과 자유주의적 경향에 대한 내용을 더듬는데 최근 발간된 책으로서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서이다.
오교수의 책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듯하다. ①종교에 대한 다원주의(pluralism)적 발상과 적용문제, ②성경에 대한 인식차이와 해석문제, ③신자들의 실제적 신앙생활에서 보이는 부정적인 면, 이런 내용에서 오교수는 많은 연구자료를 인용하면서 전통적인 교리와 신앙생활에 날카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반면 오목사는 그의 책에서 목회자에 대한 바람직한 목사와 그렇지 못한 목사로 구분한다. 성경말씀에 의거해서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그대로 가르치고 따르는 목사를 '사도목사'라 부르고, 그렇지 못한 목사, 말하자면 인기나 명예나 칭찬 받기를 원하는 목사를 '천재 지향적 목사'라고 부른다. 동시에 오목사는 교인들이 알게 모르게 비성경적인 생활모습을 지적하고, 그들의 나갈 길을 제시한다. 두 교수는 똑같이 현존하는 한국 교계와 교인들의 신앙생활 면에 관심을 경주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개선에 있어서 두 교수는 입장을 달리한다. 즉, 오목사는 현존문제를 성경적용과 바른 해석에 중점을 둔다면, 오교수는 성경 자체의 전통성에 대한 도전과 의문점을 제시한다. 따라서 전통파로부터 비신앙적이란 비판을 받기도 한다.

1. 종교에 대한 다원주의적 발상과 적용문제

오교수 저서의 핵심적 부분이라고 볼 수 있는 다원주의는 지금 발생한 새로운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논란이 지금 부상하게 된 데는 시기적으로 이 책이 근일 한국사회에 처음 데뷔하므로 교계와 신자들에게 새로운 충격을 던져 주었기 때문이다. 종교계의 다원주의란 오교수에 따르면 기독교만 유일한 종교가 아니라 다른 종교의 존재도 인정해야 하고, 그들과도 어울려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기독교 신자들이 타종교에 대한 배타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종교 상호간의 대화와 친화관계에서 평화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크게 반발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을 듯하다. 그런데 오교수는 타종교의 인정의 선을 훨씬 넘어 타종교를 기독교 신자들이 믿고 있는 같은 위치에서 보려는 시도를 높이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 전통주의자들의 거센 반발을 받고 있다.
오목사는 그런 다원주의에 대해 인간을 중심으로한 세속주의에 입각한 발상이라고 배격한다. 오목사에 따르면 인본주의는 기독교인이 재물에 대한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다는 반론을 제기한다. 정치학을 포함한 사회과학에서의 다원주의적 사고는 낡은 상식화 된 이야기이다. 각 학자간의 분야를 넘는 협동연구(Inter-Disciplinary Study)가 바로 이런 사고에 입각한 산물이다. 즉 정치적 다원주의는 자유민주사회의 구조적 체질을 의미한다. 인간의 자유와 다양한 모습은 자연적인 발로로 모두 더불어 사는 공동사회의 현실이자 바른 길이 된다. 사회내의 다양한 정당과 사회단체들과 종교를 비롯한 각양의 목소리는 다원사회의 원리로 보장된다는 것 등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캐나다의 복합문화정책도 이런 원리에 입각한 지혜의 산물이다. 그런데 오교수가 주장하는 종교계의 다원주의는 궁극적으로 기독교의 핵심고백이 되는 '사도신경', '주기도문'과 상충의 조짐을 보인다. 사도신경에는 천지창조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의 죽음과 부활 등이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주기도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는 내용은 하늘과 땅이 호흡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숨쉬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 대해 오교수는 해석법을 달리 시도한다. 문제는 기독교와 다원주의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데 있다. 교회와 사회를 두 개의 세계로 분리시킬 수 없는 오늘날의 요구에서 교회가 사회의 변화에 무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무작정 다원주의를 받아들일 수도 없는 처지이다.
그렇다면 어떤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인가? 종교의 세계는 사회와 다른 그들 특유의 차원에서 살펴야 한다는 견해이다. 불교에 관한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불교란 신을 중심하여 구성된 종교가 아니라 끝까지 인간을 중심으로하여 구성된 데 그 특징과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神인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는다. 이는 두 종교간의 근본적 차이를 말한다.
오목사는 그의 책 처처에서 이 점을 강조하며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위로부터 내리는 은혜로부터 시작된다'고 하나님중심을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불교의 인본주의와 기독교의 신본주의간에는 건널 수 없는 독립성을 보인다. 그런데 오교수의 다원주의의 입장에는 두 면이 겹쳐있다. 한 면은 각 종교간의 대화와 평화유지이고, 다른 한 면은 종교간의 동등가치와 동등위치에 대한 주장이다.
여기에서 타종교와의 대화가 다원주의의 바른 현실이라면, 종교간의 동등가치에 대한 주장은 다원주의의 역행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원주의는 본질적으로 각 종교가 갖는 특성, 즉 다양화를 살리기 위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적 모순 제거는 각 종교간의 독립성 유지에서 찾아야 한다. 따라서 다원주의는 용납하되, 각 종교간의 독립성 침해는 거부한다는 경계선이 그어져야 한다. 이런 유연성에서 각 종교의 특성과 다원주의와의 관계는 균형이 잡힐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원주의가 종교계에 적용되는 면과 적용될 수 없는 면이 있다는 뜻이다.

2. 성경에 대한 인식차이와 해석문제

사실 교계에서 요란하게 떠드는 신본주의니 인본주의니 하는 말이나 전통주의니 자유주의니 하는 표현에는 따지고 보면 매우 정확치 못한 애매한 내용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간의 경계선은 주관에 따라서 얼마든지 신축성이 있게 마련이다.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는 더욱 분명치 않는 면이 있다. 기독교는 신본주의에 속하고, 불교는 인본주의에 속함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신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 내용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그들이 속해 있는 세상에 대해서 분리시킬 수 없는 한 몸 관계를 이룬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불교도 보이는 인간과 인간 세상에 대해서만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차원 높은 세계를 그리고 있다. 교회만 보더라도 그렇다. 성전에 하나님만 꽉 차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많은 사람 중에는 선남선녀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돌을 던질 사람들이 아니라 돌에 맞을 사람들이 함께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 냄새가 나는 곳도 되고, 인간냄새를 풍기는 곳도 된다. 문제는 보는 시각과 정도의 차이라 할 것이다. 오교수와 오목사가 쓴 책도 이런 양면관계에서 어느 쪽에 더 관심을 돌렸는가 하는 차이에서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오교수는 성경에 대한 인식과 해석, 또는 교인들의 신앙 면에서 눈을 씻고 다시 보아야 할 면과 고쳐야 할 면에 보다 깊은 관심을 돌리고 있다. 소위 전통주의자들로부터는 개혁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정도의 차이와 그의 주장이 반드시 바른 시각인가 하는 견해 차이는 공개적으로 토론의 대상이 되리라 생각한다. 믿음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가르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 못박고,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오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후4:18)는 하나님의 섭리와 크신 능력을 전제로 한다. 이와는 달리 불교에서는 타력해탈(他力解脫)이 아닌 자력해탈(自力解脫)의 인간중심의 원리를 자랑한다. 이점이 바로 기독교와 불교사이의 신관과 인생관의 근본적인 차이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성경은 글자로 표현되어있는 현실에서 글자의 정확성에 대한 논란이 나오고 동시에 역사적인 산물이라는 점에서 특정시대의 표현형식과 풍습관계를 따질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이는 형식보다 내용(뜻)을 살리려는 논쟁이 나오는 것은 발전과 성숙을 위한 과정이라 할 것이다. 이런 점에 대한 양극화는 견해차이라기 보다는 전체를 보는 균형성 문제라 할 것이다.

3. 신자들의 실제적인 신앙생활에서 보이는 부정적인 면

이 문제는 대개의 경우 신조나 교법의 문제라기 보다는 따르는 신자들이 가르치는 뜻을 바르게 실천하지 못하거나 잘못된 해석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 두 저서는 많은 본보기를 들면서 지적하고 깨우침에 노력하고 있다. 오교수가 성경기록의 모순점과 변화된 외부세계의 현실에 대한 인식부족을 비판하고 있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오목사는 성경에 대한 잘못된 믿음과 사역자의 비성경적인 부족에 따르는 가르침과 지도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오교수는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비판은 깊은 연구에서 강도 높게 지적하면서, 불교나 타종교에 대한 문제점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불교의 사찰이 전통적으로 세속과 분리된 산 속에 자리잡고 자연을 벗삼아 자신의 수행정진에 유아독존의 삼매경에 몰심하고 있다면 그들이 대상으로 하는 사바세상 중생의 해탈이나 그들의 고뇌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얼른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다. 이런 경향 때문에 불교는 염세적, 소극적 종교라는 비판도 들린다. 심지어 근래에는 승려들이 無我, 無常, 慈悲를 입으로 외우면서 자리다툼에 몽둥이를 들고 몸싸움을 불사하는 괴현상을 노출시키기도 한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이런 예를 들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이는 나약한 인간이 바라는 이상과 현실간에서 방황하는 슬픈 모습이라 할 것이다. 오교수의 책은 많은 도전에서 신학에 관심 있는 분들과 사역자들이 일독해서 왜 이런 책이 발간되었는가 하는 동기와 배경에서 찬반여부에 관계없이 깨우치는 바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와는 달리 오목사의 책은 교회 사역자들과 일반 교인들이 읽으므로 자신들의 신앙생활의 이런저런 면을 반성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리라 생각한다.
두 분 교수와의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떠나서 이런 솔직한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은 오히려 서로 배우고 격려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좋은 '길벗'이 되리라는 확신 때문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라는 말씀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는 예수님의 빛나는 말씀이 너무나 멀게 보이는 세상이지만 이 말씀이 우리 모두의 부족을 깨우치고 나아가서 우리에게 더욱 용기와 희망을 주는 복된 말씀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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