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생명의 문은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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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마태복음 7:13-14를 읽어드리겠습니다.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이 말씀은 앞 문장과 뒷 문장이 서로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반의적 평행법입니다. 여기서 대조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대조됩니다.
2) 크고 길이 넓어는 좁고 길이 협착하고와 대조됩니다.
3) 들어가는 자가 많고는 찾는 자가 적음이라와 대조됩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의 대조는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크고 길이 넓어’와 ‘좁고 길이 협착하고’의 대조도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들어가는 자가 많고’와 ‘찾는 자가 적음이라’의 대조는 부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대조되려면 ‘찾는 자가 적음이라’ 대신 ‘들어가는 자가 적음이라’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렇게 하지 않고 “찾는 자가 적음이라”라고 합니다.

이 변화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그것은 들어가는 자가 적은 이유가 찾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찾는다”는 단어는 “추구한다”는 뜻이 아니라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그 문을 발견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사람들이 멸망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 길이 넓고 쉬워서 그렇고,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은 그 길이 좁고 힘들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힘들어서 못 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강조하는 메시지는 좀 다릅니다. 사람이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생명의 문을 발견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왜 발견하지 못할까요? 좁은 문이 생명의 길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영생을 얻는 거지 그렇게 힘들게 신앙생활을 해야 영생을 얻는 거야?” “하나님의 복을 받았으면 호의호식해도 되는 거지 꼭 그렇게 검소하게 살아야 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성경의 과격한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르쳐주는 바른 삶에 대한 교훈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으면 생명의 문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생명의 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성도들이 생명의 문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까요? 목사입니다. 성도들이 무시하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을 목사가 진지하게 가르쳐줘서 그 말씀 안에서 생명의 문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생명의 문을 발견하지 못해서 지옥에 간 사람이 나옵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의 부자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이고, 자기 집에 성경책이 있는 사람입니다.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옥에 갔습니다. 거기서 부자는 나사로를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달라고 간청합니다.

왜 부자는 나사로가 가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나사로가 가서 천국에 가는 좁은 문을 형제들에게 알려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형제들에게 성경책이 있으니 거기서 배우면 된다고 합니다. 성경에 이미 알려져 있는 좁은 문을 부자는 발견하지 못하고 죽어서 지옥에 갔습니다. 형제들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지도자들이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찾아가면 형제들이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성경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말해줘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무시하는 사람은 생명의 문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과격한 교훈까지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생명의 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자는 천국에 가는 좁은 문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도 발견하지 못했고,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옥에 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자의 신앙생활을 지도한 종교지도자들은 부자를 실족하게 한 나쁜 지도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종교지도자가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말씀하신 직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7:1-2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그런데 마태복음 7:13-14는 산상설교의 결론부분입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의 문맥에서 볼 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바로 앞에 나오는 산상설교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뜻은 이렇습니다.

산상설교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그렇게 사는 게 구원의 길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산상설교의 말씀대로 살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산상설교의 말씀대로 살아야 구원을 지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산상설교의 결론부분인 마태복음 7:13-27이 한결같이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산상설교를 이 정도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산상설교를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고 꼭 그렇게 살지 않아도 얼마든지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산상설교가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생명의 길을 발견하지 못해서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강조하며 행위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해서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무시해도 역시 생명의 길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지도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은혜의 복음을 철저히 전하면서 동시에 그 믿음이 산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럴 때 성도들이 생명의 문을 발견하지 못해 파멸당하는 비극을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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