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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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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주 요약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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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사는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그렇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 인간은 저주를 받아 그냥 있으면 누구나 멸망을 당하게 된다. 이 저주는 모든 사람들이 받은 것이다. 사람들은 날 때부터 죄인이고 저주 아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가계에는 저주가 흐른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살아나려면 이 저주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달리 말하면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고 거기서 벗어나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는 말은 맞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우리 주위에서 사용되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는 말이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것과는 다른 의미로 쓰인다는 데 있다.

여기에서는 신자들이 과연 저주 아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포괄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저주'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살펴보고, 다음으로 신자들이 저주 아래 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그 후에 신자들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저주란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는 것"이다.(IDB성경사전 참조) 그래서 우리가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다는 뜻이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우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자가 누구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저주가 과연 효과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후자부터 먼저 생각해보자 만일 그 저주가 효력이 없다면 우리는 저주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저주의 효과는 저주하는 자의 능력에 좌우된다. 그러면 우리를 저주하는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저주하시는가? 하나님은 죄인을 저주하신다. 그러나 신자는 저주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신자에게 임할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다 받고 돌아가셨기 때문이다.(갈3:13) 하나님이 우리를 저주한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 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여기서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고 정죄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저주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더욱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복음의 기본 원리인데, 하나님이 자기 자녀를 저주하시겠는가?

그러면 사탄이 저주하는가? 사탄은 우리가 잘못되고 망하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우리를 저주한다고 볼수 있다. 마가복음 13장 22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섲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사탄은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서 망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사탄의 저주는 과연 효력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사탄보다 강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탄도 피조물이다. 사탄이 우리를 저주해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으므로 그것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의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사탄의 저주도 효력이 없다면 다른 사람들의 저주는 물론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론적으로 신자들은 저주 아래 있지 않다.

그렇다면 두 가지 질문이 생긴다. 구약성경이 말하는 저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는 문제와 왜 신자들에게도 고통이 오는가하는 문제다.

구약성경에는 죄를 지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다. 또한 하나님이 죄지은 자에게 저주를 내리신다고 한다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는 모습(신27장)이나 십계명에 나오는 "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20:5)라는 말씀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이런 저주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끊어졌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음으로써 완전히 구원을 완성하셨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율법의 저주가 임하지 않는다.

둘째, 구약성경에도 새로운 계약이 맺어지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과거의 죄를 사하시고 다시 기억지 않으시리라고 했는데(렘31:34), 그것은 예수님으로 인해 완성되었다.

셋째, 우리는 성경을 배울 때 구약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 반드시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해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고찰한 후에 적용해야 한다.

이제 왜 신자들에게 고통이 찾아오는지 생각해보자. 신자들에게도 고통은 찾아온다. 그러면 그 고통이 다 저주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오는 고통 중에는 사랑의 징계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히브리서 12장 7-13절을 읽어보자.

"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12:7-13)

여기서 우리는 저주와 징계를 구별해야 한다. 사도행전 12장 23절에서 헤롯(헤롯 아그립바 1세)이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다가 충이 먹어 죽은 것은 저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사탄의 가시로 인해 고통당한 것은 (고전 12:7-9)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혹은 연단)였다 그 고통으로 인해 바울은 교만해지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었다.

앞에서 살펴 본 대로 신자에게는 저주가 임하지 않는다면, 신자에게 임하는 고통은 징계일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신자와 불신자가 세상에서 같은 고통을 당해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불신자의 고난은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한 징계일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저주로 인한 벌일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신자의 고난은 신자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사랑으로 주시는 징계다.

그러면 신자들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죄 때문에 오는 징계를 받지 않으려면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특별히 어떤 죄에는 징계가 있고, 어떤 죄에는 징계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지은 죄 때문에 오는 징계에 대해서는 죄를 회개하여야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때 자기를 돌아보아 잘못을 회개하는 것과 고통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에 감사하며 기도하는 일이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는 말은 신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저주는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다 끊어졌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산다. 하나님은 신자들을 사랑하시고 반드시 유익한 것만 주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항상 사랑하신다. 잘못을 저지르면 미워하고 저주하다가 잘하면 축복하시는 분이 아니다. 항상 사랑하시기에 잘못하면 잘 되라고 징계하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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