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이란 무엇인가??(목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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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소견입니다. 교수님 항상 배우는 자세로 글을 올립니다.

[중생이란 무엇인가?]

중생은 예수께서 말씀한 내용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말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물]은 [세례]를 의미한다. 그리고 고린도전서와 로마서에서 보여주는 것은 이 세례가 바로 [장사]됨을 상징하고 있다. 물로 세례를 주는 그 자체가 우리를 장사지내게 하는 것이 아닌 상징적인 의식이 물세례라는 것이다.

이러한 [물세례]가 주는 것은 영적으로 우리의 육체가 [장사]된다는 의미이다. 물론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다는 의미이다.(홍해의 사건) 그리고 이러한 물세례의 의미를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죽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영적이며 신비적인 연합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중생으로 말미암아 구원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중생을 경험하고 구원에 들어온 것이 확실하다.

그러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에서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즉 [물]이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로 [옛사람]이 죽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장사되어 죽은 자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이 [새 생명]으로 살아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러한 생명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로써 영적인 연합이 성령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중생은 [성령세례]를 의미한다.
과거의 [물세례]가 죄를 사할 수 없지만 이러한 [성령세례]는 우리를 원죄에서 해방하고 자범죄를 용서한 사건이다. 원죄의 해방과 자범죄가 해결되는 죄사함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신이 약속한 성령이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의 죄를 사해준다는 것을 설명하고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 이러한 성령은 중생을 일으키고 그 사람 안에 거하여서 그의 구원을 돕는다. 구원의 보증이 되고 구원 얻은 자와 함께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믿고 세례를 받은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은 성령으로 시작된 중생을 의미한다. 이렇게 중생되면 모든 구원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중생은 새로운 출발이며 시작일 뿐이다. 이러한 중생으로 시작된 생명은 성화의 과정이 있으며 이는 거룩함을 이루는 삶을 의미한다. 즉 영적인 훈련과 그리고 전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듭남이라는 구원의 시작이 완전한가? 보수주의에서는 중생이 되었다는 완전한 구원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중생으로 우리는 의인이 되었고 옛사람이 새사람과 새 생명을 얻었으며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 이는 구원을 얻은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구원을 지키는 개인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구원을 얻어서 중생된 자들은 구원에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시작된 구원(중생)에서 그 후에 믿음을 지켜야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즉 중생 후 성화의 과정에서 그가 옛사람의 구습을 벗어나서 성화로 나타나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화의 과정에서도 그가 여전히 옛사람의 풍습을 쫒아서 살거나 또는 믿음으로 성령을 쫒아서 살지 않고 육신을 쫒아 산다면 그는 바울의 주장대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자를 우리는 흔히 발견한다. 그가 중생을 안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중생한 이후에 믿음을 져버렸기 때문이다.

물세례가 보여주는 것은 거의 보편성을 가진다. 세례요한이 보여준 것도 그렇다.
그리고 초대교회에서도 물세례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물세례와 같이 예수의 죽음을 믿고 출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의 불세례(성령선물)는 일반적으로 주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의 시작이며 구원으로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징적인 물세례가 의미하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로 옛 세상과 옛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와 새사람으로 분리된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이러한 중생의 사건은 물세례가 아닌 불세례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모든 자들에게 성령이 일반적으로 또는 보편적으로 거한다는 것은 구원의 시작이 사람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얻어진다는 것을 충족시킨다.

그리고 구원을 얻은 자가 구원을 끝까지 지키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도 성령이 도우신다.
즉 구원을 중생으로 얻은 자가 구원을 좀더 크게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행위로 구원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 중생으로 이미 얻은 구원(의)을 지키고 믿음으로 구원 안에 머무는 성도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은 유효하며 그들은 같은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 성령으로 시작된 구원의 출발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거듭난 생명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중생된 그들이 거룩함을 버리고 옛 구습을 쫓아 타락한 삶을 살아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은 오해이다.

이는 그의 연약한 신앙으로 중생이라는 의인됨의 은혜가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이렇게 중생이 된 자가 거룩함에 이르는 것을 포기하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 타락하여 산다면 그는 중생되었지만 하나님께 인정되지 못하고 버림을 받아 결국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중생이 하나님의 역사이기에 대충 믿어도 구원이 보장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성경도 그렇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구원에서 떨어질까 조심하라! 는 말씀과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 그리고 믿음을 끝까지 지키라는 것 등은 개인의 구원은 개인의 믿음으로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것이다.

중생은 옛것과 새것으로 나뉘는 전환이라면 중생된 자가 성화의 과정에서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세상에서 육신을 쫒아 산다면 그는 망할 것이다. 이는 중생이라는 은혜를 믿음으로 얻어서 그 은혜 안에 들어왔지만 만약에 그 은혜를 져 버리고(스스로 믿음을 져버리고) 타락하여 산다면 그는 하나님의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중생도 믿음으로 얻었듯이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이루고 지키는 것도 믿음으로 이루어야 된다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지만 그 은혜를 얻고 지키는 것은 개인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개인이 개인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얻고 또 지켜야 된다는 것이다.
물론 물세례는 누구나 주어지는 의식이지만 불세례는 받듯이 믿음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세례는 거의 보편적이지만 또한 불세례를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거나 늦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믿음으로 거듭남이 이루어지고 성령을 선물로 얻기 때문이다.

카돌릭과 같은 이단에서는 이러한 거듭남이 이루어질 수 없다. 즉 성령의 보증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개신교 안에서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개신교에서 말씀을 통해서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현저히 약화 시키는 외적인 요소도 구원에 작용한다.

반면에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고 그 안에서 진리를 깨우치게 하는 지도자들의 열정과 노력에 의해 그 교회에서는 이러한 중생의 경험이 대부분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을 통한 역사는 교회에 성직을 세운 것과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큰 일은 구원을 전하고 들어온 자들을 믿음으로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는 영적인 일이 우선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풍성하게 하고 은혜가 넘치도록 하는 영적인 교회가 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형식화된 교회와 의식과 조직과 설교는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들어온 자들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많은 중생으로 인도하는 교회가 되는 것은 교회가 말씀과 성령으로 살 때에 교회의 생명력이 나타난다. 중생이라는 거듭남은 믿음으로 누구나 얻지만 또한 믿음으로 지키는 것도 중요하며 또한 개인마다 충성도에 따라서 상급이 있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타락으로 나가지 않는 한 믿는 자들에게는 상급이 크고 적음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중생이 성령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뜻을 쫒아서 사는 것이 아닌 성령의 뜻을 쫒아서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된 자가 성화의 삶을 살아야 되며 그 결국은 영화(영혼이 낙원에 거함)에 이른다. 성령으로(중생으로) 시작되었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은 불행이다.

중생을 완전한 것으로만 설명하면 그 이후 하나님이 책임지는 성화로 구원을 얻는다는 자동구원 사상이 나타난다.
중생은 중생으로 시작이라는 구원을 얻은 출발을 의미한다. 보수주의에서 중생을 하나님이 해주었으니 영화에까지 이끌고 간다는 사상은 예정에 의한 선택사상에서 나타난다.

[독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1,2,3]

[질문=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은 구분해야 되는가? 답변=구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1]

1.중생=성령세례=개인에게는 단회적인 사건=오순절의 단회적 사건과 연결된다.
2.성화=성령충만=개인에게는 삶에서 나타나는 사건=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중생 후에 지속적으로 누려야 될 충만한 삶.

[물이 죄의 씻음이라고 주장하면서 세례를 죄의 씻음이라고 주장하는 독자에 대한 답변2]

매우 좋은 지적을 하셨습니다.
물은 죄의 씻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세례도 그러한 의식이 분명합니다.

한 가지 제가 지금 고민하는 것은 보이는 침례를 바울이 말한 영적인 침례인 실재적인 침례인가라는 것입니다. 즉 목사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 이것이 단순히 의식이 아닌 믿음으로 얻기에 실재적인 바울이 말한 성령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되는 것으로 그것이 바울이 말한 세례인가라는 것에 대해서는 고민입니다.

사실 보이는 물세례를 성령과 함께 믿음으로 받으면 영적인 불세례라고 보는 시각도 타당하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앞서 글을 올린 것에서는 보이는 세례와 보이지 않은 성령으로 일어나는 영적인 세례를 엄격히 구분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형식적으로 교인이 세례를 받으면 성령이 그에게 임하지 않아서 단순한 의식에 불과할 것입니다. 즉 죄를 씻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짓으로 고백한자가 후일에 깨닫고 산다면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서 세례를 목사로부터 다시 받지는 않지만 성령으로 일어난 보이지 않는 세례가 그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보이는 세례보다 성령이 일으키는 영적인 중생이 곧 불세례라고 보는 것에 무게를 두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물론 목사가 주는 세례를 믿음으로 의식에 참여한다면 성령이 역사하는 중생의 씻음이 되는 것도 수용해야 될 것입니다.

성경은 표면적 세례와 이면적 세례로 나눕니다. 우리는 표면적 세례가 참 세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표면적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며 이면적 세례는 참된 성령의 세례로 보아야 합니다.

어떤 이는 표면적이 세례만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표면적인 세례를 받을 때에 이면적인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표면적인 세례만 받았다가 후에 이면적인 참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과 그리고 성령으로 이면적인 참된 세례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물을 죄의 씻음으로만 강조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약화될 우려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세례와 직결해서 말합니다.
다행이도 중생이라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그쪽에서 말하는 죄의 씻음과 함께 보아야 될 성경의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그 말씀은 [중생의 씻음~]이라는 말씀입니다.(성경?)

[또 다른 독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3]

중생과 칭의가 시간적으로 다르다는 것에 대한 반론입니다.
그러나 저는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을 중생과 일치시킵니다.
그리고 중생과 성화의 시작과 칭의도 일치시킵니다.(하나님의 자녀.성도,백성 등)

사실 저는 중생을 처음 웨슬리의 신생으로 이해하였으며 이러한 이해는 칭의를 중생과 분리시켜서 후에 일어나는 결정적인 신자의 사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보고 저의 생각을 수정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의를 얻은 것은 초기의 역사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으로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의 물은 단순히 요한의 침례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단순한 물세례가 아닌 물이라는 세례와 같은 일이 성령으로 일어난다는 영적인 불세례라고 생각됩니다.

물을 이렇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장사)으로 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성령으로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함께 죽었으면 또 함께 살았습니다. 여기까지는 보수주의 신학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새 생명 새사람이 된 자는 이미 구원을 얻었지만 또 구원을 지켜야 되는 시간적인 구원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물만을 이야기하면 요한의 세례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물과 성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일어나는 세례라는 의미입니다. 성령이 그리스도로 사람들을 연합(십자가)시키고 그 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부활) 영적으로 일으키는 사건을 중생의 사건이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구원은 성령으로 이루어지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건을 사람들에게 적용시킴으로 나타난 역사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물과 요한의 물과는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물은 영생수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것은 일시적이지만 하늘에서 주시는 것은 영원하다는 것이며 참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다고 봅니다.

그 외에도 하늘의 만나나 기타 영적인 표현들은 땅에서 주어지는 기쁨이 아닌 참된 기쁨과 영원한 행복을 말한다고 봅니다.

~님의 말씀대로 니고데모는 육적인 출생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은 영적인 출생입니다. 이것은 자신으로 얻을 것을 두고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출생은 영적인 의미인 물(세례)과 성령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물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오는 장사지냄도 영적인 의미이며 바울은 이러한 영적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일이 성령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분명한 것은 세례요한의 세례는 물로 준 그림자적인 세례라면 신약에서 주어지는 물은 영적인 것으로 성령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것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성령으로 주어지는 세례인 그리스도와의 연합과(장사)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영적인 출생(부활)이 신약시대의 이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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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과 [성령세례]는 같은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표면적 세례와 이면적 세례로 바울이 증거 하듯이 표면적인 세례는 단순한 물로 이루어지는 의식이라면 이면적 세례는 성령으로 나타난 참된 내면적인 세례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에서 [물]이 [세례]를 의미한다면 이는 내가 물속으로 장사되고 내가 물속에서 새롭게 살아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은 영적으로 물속에 들어갔다가 새롭게 나온 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물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죽음을 말하고 새롭게 살아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함께 일으킴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면적 세례(영적)로 나타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성령으로 살아난 자는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며, 새 생명이며,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며, 의를 얻은 자이며, 성도이며, 중생된 자이며, 성령의 세례로 출발된 자로써 새 사람으로 된 자이며,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서 그리스도로 일으킴을 받은 자로써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며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그 나라의 성도로 살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진정한 중생이 되어야 되는 문제는 남는다. 교인 중에서 믿음으로 출발되지 못한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중생 후에도 성령으로 살지 않으면 육체로 끝난다는 것 또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성령으로 중생되는 역사와 그리고 성령으로 살도록 말씀과 신앙의 훈련을 개을리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강력하게 요구해야 된다. 교회의 영적인 도덕적 질서를 유지하면서 경건한 삶이 되도록 가르치고 훈련을 시켜서 장성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내는 교회가 되어야 마땅하다. 이것이 살아있는 참된 교회의 사명이다.

중생의 상태에 대해서 살펴보면 로마서의 내용이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초기 믿음으로 모두 중생으로 들어온 것이 사실이다.(진정한 믿음)
그들은 중생 후 새사람이 된 것을 의미한다.

중생 자에게는 두 가지의 법이 나타난다.(삼분설 채택)
첫째 육체 안에 있는 [죄의 법]이 있다. 그리고 우리 안에(영혼) 성령이 거하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다는 사실이다.(지방 신학의 양태론적 일체와는 전혀 다르다. 여기에서는 성령이 영혼(혼) 안에 함께한다는 것이다. 성령이 들어왔듯이 나갈 수도 있다는 것)

모든 사람은 사실 이 죄의 법만이 있었으나(사망이 왕 노릇) 예수는 죄의 법 대신 생명의 성령의 법을 만들었다. 이 법은 육체의 죄를 벗고서 우리를 위한 의를 이룬 것이다.
결국 믿는 자들에게는 육체의 법만이 아닌 영혼 안에 거하는 성령의 생명의 법인 의가 존재한다. 믿지 않는 자들은 육체 안에 있는 죄의 법만을 따라서 산다. 그러나 중생 자들은 이미 육체의 죄와 분리(결별)된 것이 사실이다. 로마서는 그리스도인은 육체와 함께 죽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결국 죄의 육체와 분리된 것은 우리의 영혼이 성령으로 인도된다는 것이다. 로마서에서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가 장사되고 그로 말미암아 죄와의 결별(분리)은 실재적인 것이 아닌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체는 집과 같은 장막이다.(히) 그러한 육체가 실재로 깨어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며 영혼의 처소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영혼의 처소를 잃어버린 자들을 우리는 죽었다고 말한다. 육체의 장막에 영혼이 거한다는 것이다. 이 영혼이 거하는 곳이 육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영혼 안에 죄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육체에 죄가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영혼 안에 죄가 거한다면 죄는 죽어서 내세까지 따라가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죄는 육체가 끝나는 그 때에 끝난다는 것이다(원죄). 그래서 죄는 반듯이 모든 육체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의는 어디에 거하는가? 육체에 의가 거한다고 볼 수 없다. 의가 거한다는 것의 증거는 성령이다. 성령이 그에게 의가 있다는 보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거하는 곳은 죄가 거하는 육체가 아니라 육체 안에 있는 [혼]안에 거한다는 것이다.(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한다. 만약에 성령이 혼 안에 거한다고 말하지 않고 영안에 거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지방교회 신학과 같은 양태론 사상이 된다) 겉 사람은 육체를 의미한다면 속사람은 영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영을 찾으려고 하나님은 우리의 [혼]안에 성령을 우리의 영과 함께 거하게 한 것이다. 그 내영은 혼 안에서 성령과 함께한다는 것이다.

로마서에서 주장되는 구분은 [육체의 죄]와 [성령의 의] 또는 [죄의 종]과 [의의종] 또는 [겉사람]과 [속사람] 등의 이분법적인 구분은 중생이라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나타난 우리의 상태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중적인 관계에 있기에 항상 긴장된 삶을 갈아간다.(영적인 싸움)

이러한 구분은 [죄의 열매]와 [의의 열매]로 구분된다. 여기에서 죄의 열매는 자범죄를 말하고 이러한 [자범죄]는 육체로 나타난다. 죄가 육체 안에 있기에 그 육체로 죄가 표출된다. 반면에 의의 열매는 내 영이 성령을 따라 맺어진 것으로 영이 성령을 따라서 순종하자 혼으로 움직여서 육체로 선한 행실이 드러난다.

이러한 로마서의 여러 상태의 이분법적인 분리는 [중생]으로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겉 사람 안에 죄가 있어서 죄인의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 안에 성령이 거하고 그 성령이 우리 안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있음을 증거 한다. 그 속사람이 의로운 영혼으로 그를 우리는 의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의는 육체의 죄와 열매를 눌러버리는 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믿는 우리의 [영혼(속사람)]은 하나님께 인도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겉사람)]는 죄와 함께 땅에서 죽을 것이다. 세상의 학문들은 거의 사람을 삼분설로 설명하지 않는다. 영지주의도 이분설로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구조를 세 가지로 구성되게 창조한 것이다.(영혼육)

이렇게 중생(연합)으로 [겉사람]과 [속사람]으로 분리되었으나 속사람인 내 영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의의열매를 맺으나 겉사람인 육체는 죄로 말미암아 죄의 열매를 맺는다.
과거에는 [겉사람]에 있는 [죄의 종]으로 내 영(혼)이 죄의 종으로 죄의 열매만을 맺었으나 이재는 나의 영(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의 종]이 아닌 성령에 의한 [의의 종]이 된 것이다.

내 [영]은 내 [혼]안에 있는 성령을 따라서 선한 것을 나타내려고 하나 내 [육체] 안에 있는 죄가 방해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서 육체의 정욕을 복종시키라는 것이다.
이렇게 내 영이 성령을 쫒아서 살면 의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것이며, 육체를 따라간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오히려 육체와 함께 죽을 수 있다고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경고한다.

믿기 전(중생 전)에는 죄의 열매가 내 영의 것이었다.(자범죄) 내영이 스스로 따라간 것이다. 그러나 내 영과 함께 있는 성령으로 내 영은 죄를 따라가지 않고 성령을 따라가면서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도 연약한 육체를 가진 사람이기에 내 영이 원치 않아도 육체 안에 있는 죄가 간혹 튀어나오려는 것을 확인한다. 그러한 것은 육체의 연약과 죄로 말미암아 믿는 성도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보고서 바울은 탄식하면서 바울은 이 사망의 몸에서 건질 자가 누구인가라고 탄식하며 오직 우리 주 예수 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에는 죄가 거하며 우리의 [혼]에는 성령이 거하는 것이며 이는 의가 거한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로마서의 주장대로 육체와 상관없이 내 영이 혼 안에 있는 성령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인도된다.

사람의 혼에 성령이 거함으로 혼 안에 있는 내 영이 성령의 도움을 직접 받는다는 것이다. 내 영의 기도를 성령이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다. 이렇게 내 영이 내 혼 안에서 성령과 교통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은 내 영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의 혼 안에 거함으로 성령의 띠로 하나 된 공동체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속사정을 성령이 아신다는 성경의 표현도 우리의 속사람을 의미하며 속사람인 영혼에서 영의 깊은 생각을 아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직접 거하는 것이 아닌 성령이 거한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가 보낸 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 혼 안에 성령이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내 [영]은 내 [혼] 안에 거함으로 육체 안에 거하고 있으며(또는 내 영이 혼을 통해서 육체에 거함) 그 내 영(속사람)은 혼 안에 있는 성령으로 의의종이 되었고 의의 종으로 육체의 죄와 싸우는 상태가 된 것이다. 죄와 원수가 된 상태라는 것이다. 전에는 우리가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의의종이 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죄의 종]인 동시에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이 아닌 오직 의의종이 된 것이다. 육체는 죄를 내 영은 의를 따르는 자가 된 것이다.(영적 분리) 우리의 육체는 죄를 따라가려고 한다. 그러나 내 영은 성령으로 육체의 죄를 굴복시키고 육체를 의의병기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육체 안에 있는 죄의 소욕대로 내 영이 죄의 종처럼 혼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닌 혼 안에 있는 성령을 따라서 내 영이 순종함으로 육체를 굴복시킨다.

성령이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은 성령이 육체 자체에 있다는 단순한 이해보다는 육체 안에 있는 혼 안에 성령이 거함으로 말미암아 육체 안에 거한다는 의미이다. 육체 안에는 영혼이 있으면서도 죄가 있다. 성령은 죄가 있는 육체에 거하는 것이 아닌 혼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를 성전이라고 말한 것은 죄가 있는 육체를 성전 삼는다는 의미이다.

영혼이 육체를 성전 삼는 방법은 영혼 안에 성령을 거하게 하고 성령이 거하는 영혼인 속사람이 육체를 성전 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된 자들의 육체 안에 영혼이 거한다는 것은 성령이 그 영혼이라는 속사람 안에 거함으로 그들의 육체를 성전 삼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이 육이라는 물질적인 요소인 공간자체에 거한다고 보는 것보다는 사람의 혼 안에 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결국 성령은 혼으로 말미암아 육신 안에 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혼 안에 사람의 영이 거한다는 것은 사람의 영이 혼 안에 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느부갓네살 왕이 짐승과 같이 변한 것은 그의 영(정신의 기능)의 활동을 막은 것이다. 그러자 그가 혼만 있는 짐승과 같이 된 것이다. 또한 사람들 중에서 귀신들린 사람은 개인의 영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혼 안에 귀신의 영으로 말미암아 귀신이 그 사람의 영을 대신하여 혼을 조종하고 그 사람의 육체를 움직여서 고통을 준다는 것이다.

우리의 영이 우리의 혼으로 말미암아 육(물질적 요소로 된)안에 거하듯이 성령도 육체 안에 단독으로 직접 거한다고 보는 것보다 내 영이 거하는 혼 안에 들어와 내 영과 먹고 마시는 영적인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기도는 나의 영이 하는 것이지만 혼으로 움직여서 육으로 나타난다. 그 기도를 성령이 아신다는 것은 우리의 속사정을 가장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은 내 영이 거하는 혼 안에 있기 때문에 내영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이다. 방언이 영의 기도라는 것은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내 영과 성령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왜인가? 방언이라는 기도로 사람들에게 알아들지 못하는 말로 기도해도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데 입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 영은 곧 나는 알고 있다는 것이며 또한 다른 사람은 알아들지 못해도 내 영과 함께 있는 성령은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사실 내 영이 혼으로 육체를 움직인다는 것은 내 영이 거룩한 삶을 선택하고 혼으로 말미암아 육체로 움직인다면 내 안에 있는 성령은 탄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탄식하게 하는 것은 성령이 임으로 사람의 영을 조정하거나 움직인다는 것이 아니다. 돕는 다는 것이다.

내영이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하면 성령이 우리를 강하게 돕는다는 것이다.
혹 어떤 이는 성령이 우리의 믿음과 상관없이 돕는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특수한 경우는 제외)
어떤 사람의 영이 세상을 선택하고 거짓된 마음을 먹고 음란과 부도적한 짓을 선택하여 혼으로 육체의 죄가 원하는 일을 행할 때에 성령이 이렇게 못하도록 혼 안에서 막아주는 성령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위해서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할 때에 혼 안에 있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기쁨을 주고 신령한 은혜를 준다는 것이다. 즉 믿음만큼 성령이 역사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속일 수 없다. 성령은 우리의 속사정을 매우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영의 기도를 성령이 하늘로 올리는 것 또는 예배를 드리도록 돕는 일을 한다. 우리가 거짓된 마음으로 예배드리면 성령이 역사해서 막아버리고 진실한 예배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 영의 믿음에 따라서 그 분량대로 정직하게 하나님께 올리고 또 참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성령이 그를 돕는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기도하면 영의 기도이며 혼으로 말미암아 육체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그러한 기도를 올리는 역할을 성령이 감당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는 사람의 영이 믿음으로 결단하고 혼으로 말미암아 육체로 드러난다.
혹 드러나지 않아도 내안에서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이렇게 삼분설의 구조로 접근한 것은 지방 신학의 양태론인(위트리스니) 사람의 영과 하나님의 영과의 일체(혼합)와는 다르다. 그리고 정통신학이 주장하는 삼위일체 동등의 입장과 사람의 구조인 이분설의 입장과도 또한 다르다. 이 글에서 주장된 것은 하나님의 본질인 삼위도 동등의 삼위일체신학이 아니며 수직적인 삼위일체를 주장하기에 성부가 가장 본질적 본체이며 그 다음은 그 성부의 영과 성부의 아들로 나타난다. 이러한 것은 사람의 삼분설의 구조도 사람의 영이 가장귀하고 그 영의 혼과 육체를 주장한다.

이러한 사람의 구조에 있어서 삼분설의 이해와 관계적 접근은 기존의 양태론의 오류를 시정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본질적 동등을 주장하는 삼위일체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관계적으로 접근함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신학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의 이해도 사람의 구조인 삼분설로 접근해서 이해하므로 그 관계 속에서 사람의 구원을 설명하는 로마서의 이해를 돕는데 큰 역할을 감당한다.

이분설의 단점은 죄와 의로 말미암는 관계와 구분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분설로 로마서를 이해하면 영혼육이라는 구분보다는 삼위일체와 같이 사람의 구조도 영혼육 일체중심으로 접근함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죄인이며 의인이라는 동시적인 주장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죄와 의의 분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을 통일체로 보기 때문)
또한 중생의 결정적인 분리를 설명하는 것보다는 죄를 회개함으로 의를 얻는 것으로 단순히 설명한다.(칭의) 그러므로 이미 의를 얻었고 사함을 받았다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범죄의 이해에 있어서는 계속적인 회개만을 강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는 원죄에서 해방된 자들은 자유자이며 속사람과 겉 사람의 구분과 자범죄의 회개중심보다는 원죄에서 해방된 자들이 의인으로 의의 열매를 맺고서 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과거에 너희가 이렇게 원죄에서 해방되었고 분리되었으니 이재는 속사람인 의의종 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삼분설은 양태론도 아니며 그리고 영지주의의 이원론도 아니다. 이러한 삼분설의 접근은 영지주의와 양태론과 정통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풍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구조인 삼분설과 삼위하나님으로 구원론을 이해하면 사람이 육체는 그리스도로 죽은 것이며 혼은 성령이 거한다는 특징이 있고 영은 하나님께 인도 된다는 것과 관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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