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는 교회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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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부족한 자가 글을 하나 게재합니다.
항상 주안에서 건강하세요...

[장로교 목사(감독)의 위치가 심각한 정치적인 갈등을 안고 있다]

장로교 목사의 위치가 불안하다는 것은 목사의 위치가 이중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파송된 감독이라는 목회적인 위치가 있으면서 동시에 지교회의 조직이라는 당회의 회원이라는 것이다.

목사가 당회장이냐 혹은 감독자이냐 라는 이중성은 목사의 목회가 이원화되게 만들었다.
흔히 교인들이 목사를 독재자로 보는 경향은 그 목사가 감독자로써 생각하고 일할 때에 교인들은 목사를 독재자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는 목사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에서의 감독자가 아닌 교회공동체가 고용해서 사역하는 조직공동체가 필요한 자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감독은 하나님이 필요해서 감독을 세웠고 그 감독으로 교회를 다스린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지교회의 청원에 의해서 지교회의 조직에 감독을 종속하게 하고 교회는 감독에게 조직 안에서(당회원) 정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감독자가 지교회조직의 일원으로 구성원이 되어서 일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오히려 초대교회의 감독정치에서 알 수 있듯이 감독은 큰 지역의 전교인(교회)을 다스릴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이러한 이유로 교황정치가 이후에 쉽게 받아들여진 이유가 된 것은 사실이다)
지교회의 조직이 있고 그 조직이 아무리 막강해도 성경에서 말하는 감독은 적어도 그 교회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교회 안에 어떤 조직이 있다 해도 감독은 그 조직을 다스릴 수 있는 직분이라는 것이다. 조직은 사람의 구조라면 하나님의 교회의 감독은 그 사람들을 감독하는 감독자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이든 사람들이나 또는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진 사람들이나 혹은 지식을 가진 자들이 즐비해도 감독은 그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위로부터 안수해서 얻었다는 것이다.

사실 감독과 장로의 직분이 있으면 지교회의 조직이 없어도 성경을 위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지역교회(지역교회)의 유일한 감독과 그 지역교회 안에 있는 더 작은 지역을 맡은 여러 장로들일 것이다.
이렇게 감독과 장로와 집사는 교회의 직분이 아닌 하나님의 성직이며 하나님이 주신 신적 권한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설명한다.(대리적 다스림)
이러한 직분은 근본적으로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직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도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운 직분이라는 것이다.

과거에 시대의 정치를 따라간 기독교 역사와(교황정치) 오늘날 시대의 정치를 따라가는 교회민주정치가 오히려 성경적인 교회를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교회노조가 형성된 것이다. 교회에 노조가 생긴 것은 교회가 교황정치를 따라간 타락과 맞먹는 심각한 정치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통치와 연결된 교회의 성직이 있으며 이는 교회자체 공동체가 우선이 아닌 감독자들이 성경을 가지고 다스리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장로의 역할이 목사를 위한 협력자들이 되어야 마땅한데도 오히려 견제의 세력이 된 것이 사실이며 이는 교회 문제의 도화선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감독의 위치와 장로의 위치가 같다는 주장은 한 조직의 의회를 만들게 함으로(당회) 독자적인 본래의 성경적 감독직을 상실시키고 교회의회로 다스려지게 만든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감독(목사)과 장로가 통합된 단일한 조직으로 되었기에 감독직이 상실된 것이다. 본래 감독은 유일한 목회직으로 일반장로와 구분되어야 정치적인 충돌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를 감독의 위치보다 교회조직의 대표나 회장으로 만든 결과 같은 의회의 조직인 당회원의 장로들은 자연히 감독(목사)을 강력하게 견제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 민주화의 발전으로 이러한 견제세력은 더욱더 교인들로 힘을 얻어서 강력하게 견제하려한다. 이러한 두 세력(목사와 장로들)의 정면충돌은 교회를 나누어지게 하는 원인이 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견제가 심화되어서 교인들까지도 직접 목사를 견제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흔히 주장하는 민주주의 절차인 신임투표이다.
그 교인들의 신임투표가 안수 받은 하늘의 권한도 무너뜨리게 하는 것이다.
마땅히 다스림을 받아야 될 그들이 다스리는 자에게 도전하는 심각한 영적인 혼란을 가져온 것이다.

어떤 이는 사도의 역할이 총회이며 감독의 역할이 노회이며 장로의 역할이 당회라고 주장한다. 과연 의회조직(총회, 노회, 당회 등)으로 다스려지는 것이 성경적인가??
물론 있는 조직을 당장 없애라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정치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총회가 있기에 노회가 큰 의회인 총회로 다스려지고 노회가 있기에 작은 당회가 노회로 다스려진다는 것이다. 심각한 것은 지교회의 조직이다. 지교회의 당회는 노회나 총회와 별도로 의회조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작은 총회가 된 것이다.(그 안에 무수한 기관들)

차라리 총회가 노회를 노회가 당회를 강력하게 하회를 다스리는 것으로 되었다면 지교회의 방만한 것은 막을 수 있는데 문제는 지교회의 권한이 스스로 교회를 운영하는 독립적인 의회조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지교회의 조직에 노회가 파송된 목사가 종속되게 만든 것이고 목사는 감독자라는 목회직과 당회의 회원이라는 이중성을 가지고 일하게 된 것이다.

이중성에서 그 하나는 노회에서 파송된 목회(감독)직과 또 하나는 지교회에 종속되어서 지교회의 대표인 당회장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결과 지교회의 종속된 자로써 의회원들이 원하는 일을 하면 살아남지만 혹시 용감하게 성경적인 감독(목회)직을 우선해서 다스리려고 하면 강한 조직적인 저항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목사(감독)에게 대항하려는 자들이 대부분 교인의 대표인 장로들이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불합리한 구조로 지 교회에서 목사의 위치는 감독직과 그리고 조직의 일원(대표)으로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목사가 교회에서 정치적으로 살아남으려면 조직에 충실하려는 경향을 이러한 이유이다.
이렇듯 목사를 당회에 종속시키게 되자 당회의 의결로 지교회가 운영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사실 교회주식회사와 같이 된 것이다. 그 회사는 목사를 고용하고 사용하는 위치가 된 것이다.
이렇게 감독인 목사가 성경적인 감독(초대교회의 1~2세기의 전통)이 아닌 조직의 대표나 회장의 역할 즉 의회 안에서 일하는 자로 만들게 된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감독들이 교회에서 쉽게 물러날 수 있는 정치적인 구조를 가지게 된 것이다. 지교회가 고용하고 사퇴시키는 것이 투표로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과연 이렇게 교회의 권한이 교인들로부터 오는가??

감독은 스스로 성경에서 증거 되듯이 모든 것보다 스스로 성경을 가지고 복종하는 자라는 것이다. 본래 감독은 총회나 노회나 당회에 의해서 감독직이(목사)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본래의 감독직은 의회조직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감독들이 감독을 세운 것이다.
이러한 것은 사도가 감독을 세웠듯이 감독과 장로들은 감독을 세우고 파송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한 감독은 일정한 지역을 감독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감독위에 감독 없고 감독아래 감독 없다.(유일직)
그리고 감독위에 대감독은 그리스도이며 감독아래에 작은 감독의 일을 돕는 장로가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문헌에서도 감독과 장로는 구분되었다.
그리고 감독은 지역의 유일한 대표적 감독직을 감당한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다.(로마의 감독) 그러나 장로는 감독처럼 큰 지역의 대표를 감당하기보다 감독의 지역 안에서 여러 명의 장로들이 있었고 그들은 감독의 지도아래서 각성을 감당한 것이 사실이다.

과연 2세기에 감독과 장로가 같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가?(같은 위치) 오히려 문헌들은 감독의 독자적인 위치를 증거 한다.
이렇게 단순하고 사도들로 세워진 교회의 정치가 타락해서 교황 계급정치로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의 의회조직의 위험성은 성경적인 사도적 교회정치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들은 감독을 교회에 세웠다.(1세기) 이는 사도적 세움의 원리이다.
감독은 그 후에 도시의 교회를 감독하였다.(2세기 이후) 이러한 감독정치의 원리가 있었으며 동시에 감독과 달리 장로라는 직분이 있었다. 그들은 감독에 의해서 다스려진 장로로 보아야 한다.(이 장로는 감독의 지역 안에서 여러 장로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면 감독이 도시전체를 대표한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로마, 에베소 등)
그 후에 개인적인 교회의 감독정치가 로마교회에 의해서 교황정치로 나아간 것이다.
이렇게 교황으로 교회를 통제하려는 것은 계급적인 교회의 타락한 정치를 만든 것이다.
이러한 계급적인 것에 반기를 든 종교개혁은(시민봉기 운동) 아래의 계급인 신부로 시작된다. 이렇게 아래로부터 시작된 교회의 개혁은 절대적인 교황정치를 거부하고 의회로 다스리는 정치를 서서히 만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신부인 루터파는 개인적인 성직을 중시했다. 그러나 대 신학자인 칼빈과 제네바 시민대표 기구인 의회의 만남은 칼빈주의 정치의 모태가 된 것이다.
이들은 오늘날 감독정치와 의회정치의 모태가 된다고 볼 수 있다.(회중정치도 포함)
오늘의 개신교회는 종교개혁으로 이루어진 정치모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교회의 정치는 세상의 변화 속에서 정치를 만든 것이다.
처음에는 왕정정치를 그다음에는 의회정치를 그리고 오늘날에는 완전한 민주주의 교회를 꿈꾸고 있다. 그것은 교회의 주권이 교인에게 있다고까지 주장하게 된 것이다.

교황정치가 성경적인가? 의회정치가 성경적인가?
답은 모두가 사도들이 세운 교회의 정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주장하고 싶은 것은 사도들이 세운 초대감독정치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이다.
의회조직은 개인성직으로 다스려지는 성경적 원리를 교회의 의회조직으로 대체시킨 것이다. 이렇게 바뀌자 감독(목사)이라는 성직자가 안수된 자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교회를 감독하고 다스리는 것보다는 교회의 조직이 감독(목사)을 종속시킨 것이다. 결국 감독이 교회의 의회 안에서 의회의 다스림을 받도록 만든 것이다.

15,16세기 종교개혁이 이루지 못했던 성경적인 정치를 다시 초대교회를 연결하는(1,2,3세기) 정치로 개혁이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그것은 1, 2세기의 교회정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정치의 틀은 사도들에 의해서 확실히 완성되었다.
물론 1세기의 초대교회도 초기, 중기, 말기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으며 우리는 말기에서 교회정치의 완성을 찾아야 된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감독과 장로들에게 교회를 맡긴 것이 사실이며 이러한 사실은 2세기의 정치와 당시의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감독들의 증언)
그렇다고 감독과 장로가 같다고 볼 수 없으며 그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오늘날 장로교의 목사와 장로는 초대교회 당시에 개인이 도시를 대표하는 감독과 그 도시 안에서 여러 장로들이 있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오늘날 장로교의 목사들은 초대교회의 감독의 위치와 다르다는 것이다.
오늘날 장로교의 장로는 초대교회의 장로와 다르다는 것이다.
이렇게 목사와 장로의 이중적인 정치구조는 심각한 정치 갈등을 양성했고 지교회가 나누어지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이다. 개 교회뿐 아니라 이러한 나누어짐은 교파와 교단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어떻게 교회의 정치가 이렇게 심각한 정치적 갈등구조로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이것이 성경적인가? 적어도 초대교회는 단일한 정치가 존재한 것이 사실이다.
1세기는 사도들이 그들을 다스렸고 (사도-속사도-장로들) 그 후에 감독과 장로로 교회가 다스려진 것이다.(집사포함)
사실상 지금의 총회, 노회, 당회라는 의회로 다스려지는 의회정치는 성경을 상당히 벗어난 교회의 정치라는 것이다.

오늘날 지교회라는 공동체에 조직이 있고 그 조직은 교회를 스스로 운영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교회의 조직이 스스로 운영한다는 것에서 문제를 찾아야 한다.
조직의 힘은 그 전체 공동체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며 그 방법이 조직이라는 것이다.
성경적인 교회는 세상에 스스로 있는 조직이 아니다.
교회공동체는 하늘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성경과 성령에 의해서 교회가 다스려지되 반듯이 하나님이 세운 감독으로 다스려지는 것이 마땅하다.(장로와 집사포함)

이러한 성직은 땅에서 주어지는 직업을 가진 직분이 아니다. 하늘에 의한 직분이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다. 마땅히 세상직업이 없어도 교회는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다.
이렇게 다스리는 자들을 교회는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며 그들의 수는 오늘날과 같은 많은 수의 성직이 아니라는 것이다(제한된 적은수의 감독을 말한다. 그러나 장로들은 세상의 직업을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초대교회의 다스리는 원리는 공동체의 조직인 의회가 아닌 개인적인 다스림으로 직분이 주어진 것이다. 개인적인 다스림은 초대교회에서 사도-속사도(감독)-장로로 구성되었다.(개인 안수)
그들은 개인영역을 정하고 개인이 맡은 영역을 다스린 것이다.(감독은 도시와 같은 큰 지역을 장로들는 그 안에서 작은 지역을 감당한 것)

하나님은 이렇게 하늘의 통치를 받도록 개인에게 안수해서 교회에 감독자를 허락한 것이다.
반듯이 안수는 개인적으로 받고 그에게 성직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개인의 다스리는 영역이 보장되는 것과 깊이 연관된다.
이러한 개인의 안수는 교회를 다스리는 중요한 세움의 원리로 시작된다.
오늘날의 문제는 이렇게 개인을 안수하여 하늘에서 세우는 원리보다 의회라는 조직의 원리를 교회가 끌어들이고 발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원리로 세워진 것이 교회의 성직이었다.
그러나 의회는 안수해서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모여서 총회는 할 수 있으나 의회의 조직을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처음에는 왕정정치를 본받아 교황정치를 만들었다. 그리고 종교개혁이후에 개신교는 의회정치를 발전시킨 것이다. 본래 성경적인 교회의 정치는 지역 감독정치라는 것이다. 감독일인 체제는 사도들이 세운 것이며 그 감독은 장로들과 성도들을 다스렸다. 물론 역사적인 희미한 증거들도 이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감독위로 교황정치를 배격하고 감독을 의회로 종속시킨 의회정치를 반대하면서 초대교회의 개인 지역감독과 장로들로 다스려지게 하는 것이 성경적인 정치개혁일 것이다.
사도들은 성경을 기록하고 그 사도들이 감독을 세운정치가 성경에 기록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는 2세로 넘어간다. 이러한 감독정치는 단순한 정치가 아닌 사도들이 세운 정치이며 성경이 지지하는 정치이다. 사도는 교회만 세운 것이 아닌 교회의 정치도 함께세운 것이다. 사도들이 세운 교회의 정치가 성경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게 주장하면 오늘날도 우리가 임으로 사도를 세워도 된다는 논리가 정당화 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2세기의 교회감독정치는 1세기 사도들의 정치를 대부분 오염시키지 않았다.
시간적으로 가까운 관계도 있지만 분명히 감독을 사도가 세웠다는 것에서 자신들의 세움을 사도적 계승으로 연결한다. 누가 오늘날 다시 2세기 초로 돌아가면 장로정치와 교황정치와 기타의 세상정치를 주장하겠는가? 사도가 얼마 전에 죽었다는 것보다는 사도들이 세운 교회와 정치를 모두 교회가 지켰다는 것이다. 이는 사도가 기록한 성경만이 아닌 사도들이 세운 제도도 함께 성경의 정치로 인정한 것이다. 이는 감히 2세기에는 이론과 제도를 분리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감독인 클레멘트나 이그나티우스 등의 서신으로 보아서 감독과 장로는 분명히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참고는 종로서적에서 발간한 [크리스찬 기원의 여성 신학적 재건]이라는 책을 소개합니다

장로교는 의회의 구성이 지교회 같은 경우에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었고 이는 당회의 회를 통한 결정 등으로 교회가 운영되게 만든 것이다. 사실상 교인들의 통치라는 것이다.
결국 목사와 장로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문제를 남긴 것이다.
장로교의 문제는 목사의 위치이다. 목사의 위치가 의회의 회장과 함께 감독(목사)의 직분이 겸해져 있다는 것이다. 지교회의 당회는 목사를 조직의 회원으로 만들려하고 목사는 감독자로 서려고 할 때에 정치적인 충돌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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