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성경공부

제5과 사도들의 첫 설교

작성자 정보

  • 오덕호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1. 지난주에 살펴본 사도행전 2:1-13에서 성령이 임하고 제자들이 방언을 하자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 중에 악한 반응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오늘 본문의 14-15절에서 베드로는 그 반응에 대해 어떻게 응답합니까? 유대인들의 악한 비방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잘못의 한 유형을 보게 됩니다. 그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 중에 일부는 제자들이 술에 취한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이 때 시각이 아침 아홉시이기 때문에 술에 취한 것일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녁에만 술을 마십니다. 그러므로 아침에 술에 취했다고 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비방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편견을 가지고 논리에 맞지도 않게 남을 비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이런 모습의 한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편견이나 자기의 목적 때문에 말도 되지 않는 말로 남을 비난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우리 주위에서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정치인들의 상호비방이 이런 경우가 있습니까? 조금 다르지만 잔치 비유에서 밭을 샀다거나 소를 샀기 때문에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말도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말로 하나님의 초대를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2. 베드로는 제자들의 방언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성경을 인용합니까? 그 구약 성경의 중요한 내용 세 가지를 찾아보십시오.

    베드로는 요엘 2:28-32를 인용합니다. 이 문단에서 세 가지 주제가 중요합니다. 첫째, 말세에 주님의 영을 사람들에게 부어준다는 것; 둘째, 종말에는 큰 재앙이 임한다는 것; 셋째, 그 때는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3. 제자들이 방언한 것은 이 구약 성경 말씀 중 어떤 내용과 관련이 있습니까?

    제자들이 방언한 것은 사람들이 주님의 영을 받은 것과 관련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방언한 것이 성령을 받은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요엘서와 연결시켜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4. 만일 방언이 성령이 임한 것이라면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뜻이며 그렇다면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님이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은 말세에 일어날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령이 임하셨다면 이제 큰 재앙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말세에는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구원을 받으므로 사람들은 속히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물론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믿고 도와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은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고 그 핵심이 구원자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5. 주님의 이름을 부르려면 주님의 이름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는 주님이 누구라고 합니까?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어떤 증거를 말합니까?

    요엘서에서는 주님이 여호와이십니다마는 베드로는 하나님이 주님으로 세우신 분을 별도로 알려줍니다. 그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베드로는 예수님의 기적 사역과 부활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셔서 부활을 통해 주님이심을 확증해주셨습니다.

6. 예수님이 주님이신 증거 중에 베드로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구약을 인용합니다. 구약 어느 부분을 인용합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이 주님이신 증거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시편 16:8-11을 인용합니다. 주님의 거룩하신 자로 썩지 않게 하시는데 이것은 다윗에게는 해당이 안 되고 메시야에게 해당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중요한 증거인 것입니다.

7.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왜 그랬을까요? 만일 유대인이 아니었다면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마음에 무척 찔려합니다. 그들은 지금 성령이 임하셨다면 이제 곧 종말이 오리라는 두려움과 더욱이 자기들이 메시야를 죽였다는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찔리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아니라면 크게 감동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약을 인용하는 것이 설득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약을 알고 믿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 설교가 두렵고 강한 설교였을 것입니다.

8. 사람들의 반응에 베드로는 어떻게 대답합니까? 베드로의 대답은 복음입니다. 그 안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그들이 두려워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염려하자 베드로는 그들에게 회개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합니다. 이 복음에는 회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는 것, 죄 사함, 성령 받는 것, 구원받는 것이 나옵니다. 여기서 회개는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믿게 되는 것이고, 믿기 때문에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 때문에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게 됩니다. 물론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이것이 순서대로 하나하나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 내적인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고 외적인 것은 적절할 때에 일어나게 됩니다. 특히 믿고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회개하고 믿고 구원받는 것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대체로 성령을 받는 것도 같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는 것은 나중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8:14-17에는 사마리아 성도들이 믿은 후 나중에 성령을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겠습니다.

9. 그 날 몇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까? 여기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3,000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위대한지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8에서 제자들이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고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 했는데 제자들이 성령을 받자마자 베드로가 성령의 권능으로 설교를 했고 이렇게 큰 복음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과 역사를 느끼며 우리도 성령의 권능으로 사역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10. 우리 중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 있다면 속히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이런 찔림을 받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찔림이 없다면 왜 그럴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으면서 설교를 들을 때 찔림이 없다면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는 설교에 성령의 권능이 없거나, 우리가 설교 말씀을 바르게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입니다. 설마 우리가 완벽하기 때문에 설교를 들어도 찔림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설교의 내용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설교라면 설교자의 설교 기술 때문에 우리의 자세가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말씀만 읽어도 우리에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우리가 찔리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자의 능력 운운하지 말고 우리의 자세를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도 찔리지 않는 것은 종말론적인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회개하라고 해도 아직 종말이 멀었고 기회가 많으니까 천천히 하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찔림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지만 심판의 두려움과 거기서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같이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도 바로 깨닫고 신앙생활을 바르게 고쳐나가는 데 유익합니다.

11. 말씀에 찔림을 받으면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과연 그렇게 합니까? 만일 신자들이 설교를 들으며 그렇게 된다면 교회가 어떻게 될까요?

    마음에 찔림을 받으면 그 때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세례 받았듯이 우리도 회개해야 합니다.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는 없고 삶을 고쳐야 합니다. 그것도 신속하게 고쳐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설교를 들어도 별 변화가 없다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신자들이 설교를 들으며 변화가 된다면 교회는 새로워지고 크게 부흥할 것입니다. 예화 하나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셨습니다. 목사님이 부임하신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동네 가게 주인이 손님들에게 목사님을 칭찬하는 겁니다. "이번에 이 교회에 오신 목사님 기가 막히게 설교를 잘 하십니다. 이 교회에 한번 나가보십시오." 하도 이렇게 선전을 하니까 하루는 손님 한 사람이 주인에게 물어봤습니다. "목사님이 지난 주에 어떤 설교를 했습니까?" 주인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손님이 핀잔을 줬습니다. 설교를 잘 한다면서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도 모릅니까? 그러자 주인 얘기가 자기는 교회에 안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 설교를 들은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목사님이 설교를 잘 하신다고 말하느냐는 손님의 질문에 주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오신 다음부터 그 교회 교인들이 외상값을 갚기 시작했습니다."

12. 성령이 임하신 것이 종말론적 사건이라면 아직 예수님이 재림하시지 않은 것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종말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자세는 어떤 것입니까? 우주적 종말과 개인적 종말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은 종말에 대해 두 가지를 알려줍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때를 말하는 것으로서 좁은 의미의 종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 때까지의 모든 시간을 종말론적 시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사람들은 종말론적인 구원을 얻어 맛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 이미 종말론적인 사건이고 지금 우리는 종말론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종말에 대한 우리의 바람직한 자세는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자세, 당장 오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자세로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우주적 종말은 늦어지더라도 개인적 종말(죽음으로써 더 이상의 기회가 없는 것)은 정말 언제 올지 모르지 않습니까.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443 / 1 Page
번호
제목
이름

성경공부


최근글


새댓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