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과 사도회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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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덕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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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대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이 수리아의 안디옥(앞으로 별다른 언급이 없는 한 안디옥은 수리아의 안디옥입니다)에 와서 무엇을 주장합니까?

해설: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이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교회에 생긴 새로운 문제점입니다. 이전에는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 식사한 것이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베드로의 설명으로 잘 해결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이방인들과의 교제를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이에 대해 바울과 바나바는 어떻게 응답합니까? 왜 그렇게 응답했겠습니까?

해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주장에 반대하며 크게 논쟁을 벌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크게 반대한 것은 이들의 가르침이 복음을 거스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면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됩니다. 혹은 예수님이 주신 구원은 완전한 것이 못되어 인간이 행위로 그것을 완성해야 된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복음을 모독하고 방해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강하게 반대하며 논쟁한 것입니다.

3) 안디옥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해설: 대표자들을 예루살렘교회에 보내어 이 문제의 답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먼저 이것은 겸손하고도 신중한 모습입니다. 안디옥교회도 충분히 건실한 교회지만 그래도 교회의 중심지이고 지도자가 많은 예루살렘으로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의견을 들으려고 하는 것은 겸손하면서도 신중한 자세로서 좋은 모범입니다.

다음으로 이것은 화목을 존중하는 자세입니다. 여기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은 유대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상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이 정말 유대에 있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전하는 것인지 실제로 유대에 있는 교회는 어떻게 가르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의 기독교와 유대의 기독교가 서로 논의하여 오해 없이 화목한 가운데 일치된 방향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귀한 모범입니다.

4)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까?

해설: 다 모여서 이 문제를 논의합니다. 서로 자유롭게 자기의 의견을 말하면서 차츰 결론을 찾아갑니다. 이것도 귀한 모범입니다. 이들은 이 문제를 한두 사람의 일방적인 의견에 따라 결정하지 않고 서로 많은 토의를 하며 서로 설득함으로써 해답을 찾아갑니다. 특히 야고보가 베드로의 말에 대해 수정안을 내놓는 것은 이 회의의 분위기가 아주 민주적이었음을 암시합니다.

5) 의견이 분분할 때 베드로가 무엇을 주장합니까?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해설: 자기가 경험한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이방인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또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에 대해서도 듣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설득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야고보가 절충안을 내어놓은 것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6) 야고보의 수정안은 어떤 내용이며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해설: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강요하지 말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인정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워낙 잘 알려진 율법들이 있으니까 이런 율법만 지키라고 권하자고 합니다. 그 율법이란 네 가지 금령으로서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협의 중요성을 가르쳐줍니다. 이것은 할례를 강요하지 않으므로 율법의 멍에를 메우지 말자는 베드로나 바울이나 바나바의 의견을 상당히 존중하는 의견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몇 가지 대표적인 율법을 지키라고 함으로써 율법을 지키게 해야 한다는 측의 의견을 어느 정도 존중해줍니다.

7) 이 절충안은 회의에서 어떻게 되었으며 이방인의 교회에는 어떤 결과를 초래하였습니까?

해설: 야고보의 절충안이 회의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나중에 회원들의 이름으로 보낸 편지가 이것을 잘 가르쳐줍니다. 편지에 나온 내용 중에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라는 말은 율법주의적인 말을 한 사람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또한 바울과 바나바를 칭찬하는 말도 그들의 견해가 기본적으로 옳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다만 율법의 요긴한 것을 알려줌으로써 복음주의가 율법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고 또한 율법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잘 공감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이방인의 교회들이 이 결정을 듣고 기뻐하였고(행 15:30-31) 또한 부흥된 것(행 16:4-5)을 볼 때 이 절충안은 당시 교회에 크게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행 15:30-31)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행 16:4-5)

8) 이 회의에서 결정한 것은 복음을 파괴하는 것입니까?

해설: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복음은 예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 얻은 사람은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해 율법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정상적인 신자들은 이것을 잘 알지만 이방인의 초신자들은 복음을 들을 때 율법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오해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율법 준수를 강조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교회에 이런 염려를 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런 사람을 위해서도 율법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래서 당시 교회의 상황에서는 이 정도의 율법을 강조하는 것이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교회가 이 결정을 듣고 기뻐했고 또한 부흥되었다는 점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9) 오늘날도 교회가 이 결정을 지킵니까? 지키지 않는다면 왜 지키지 않습니까?

해설: 오늘날은 교회가 이 결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결정이 당시 교회의 유익을 위한 일시적인 교훈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어 율법을 강조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당시 교회를 위한 타협안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교회에는 유익한 것이었지만 신앙이 성숙해지면 그런 금령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복음만을 전하는 것으로 충분해집니다. 혹은 금령이 필요하더라도 사회의 유혹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면 다른 금령이 더 중요하고 이런 금령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후대 교회에서는 이 결정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 당시의 교회에는 유익한 결정이었다는 것입니다.

10) 우리는 교회에서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해설: 교회 전체의 문제는 노회나 총회에 문의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각 부서의 문제는 당회나 교회 지도자에게 문의합니다. 이것은 안디옥교회가 예루살렘교회에 문의한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자세가 겸손한 것이고 또한 교회의 통일에 유익한 것입니다.

11) 우리는 교회에서 충분히 서로 의견을 나누며 의논합니까? 만일 한두 사람의 의견대로 하는 경향이 있다면 과히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비록 교회에서 중직을 맡지 못한 사람의 의견이라고 해도 그것이 충분히 개진될 수 있어야 합니다.

12) 우리의 신앙생활에 유익을 주기 위해 주어진 금령이 있습니까?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해설: 모든 교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교회가 술과 담배를 금합니다. 이것은 구원과 관련된 계명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온 후에 한국인의 신앙생활에 유익할 것으로 생각되어 교회에서 결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 지키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다만 이것은 일시적인 교훈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교인들의 형편을 고려하여 적절할 때에 수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지역의 한 교회 한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교단의 총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13) 율법은 복음적인 신앙생활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입니다. 은혜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으려는 율법주의는 나쁘지만 율법 자체는 좋은 것이며 율법을 지키는 것은 신자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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