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성경공부

제19과 하갈과 사라의 비유도 복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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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덕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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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비유를 사용한다. 비유는 설명과 설득에 아주 효과적이면서도 아주 위험하다. 칼이 잘 들면 아주 효과적이면서도 아주 위험한 것과 같다. 비유를 잘 해석하려면 비교점(비유가 설명을 위해 비교하는 부분)을 잘 알아야 한다. 이것을 왜곡하면 거짓교훈이 된다. 두 가지 유형의 비유를 살펴보자.

1)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9-37): 비유 전체의 주제인 어려운 이웃을 돕는 문제가 비교점이다. 예루살렘, 여리고, 여관, 등은 비교점이 아니다. 이런 장소들은 바뀌어도 된다. 그래서 이웃사랑의 강력한 메시지를 준다. 그러나 이런 장소들을 비교점으로 보아 예루살렘은 천국, 여리고는 세상, 여관은 교회를 의미한다고 보면 이웃사랑이 아니라 구속사설명이 된다. 심지어 여관을 이단의 특정단체, 여관 주인을 이단지도자라고 설명하면 그 이단을 위한 비유가 된다. 악하게 오용되는 것이다.

2) 악한 농부의 비유(막 12:1-12): 비유 전체의 주제인 소작세를 잘 내는 문제가 비교점이 아니다. 이 비유는 하나의 비교점을 가진 게 아니라 여러 비교점을 가지고 있다. 주인은 하나님, 종은 선지자, 아들은 예수님, 소작인인 유대종교지도자, 등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영접을 받아야 하는데 유대지도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비유가 효과적인 것은 하늘의 진리를 이 세상의 현상으로 설명하여 쉽게 이해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교사가 악하게 이용하면 미혹의 도구가 된다. 본문에서 바울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구약의 한 사건을 비유로 설명하며 복음의 진리를 논증한다. 비유의 내용은 이렇다.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고 나중에 사라를 통해 이삭을 낳았다. 바울은 이 둘의 관계가 율법과 은혜의 모습과 같다고 하며 복음이 진리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1) 하갈은 종이고 이스마엘은 종의 아들로서 유업을 받지 못한다. 사라는 아내이고 이삭은 진정한 아들로서 유업을 받는다. 이것을 바울은 이렇게 비유로 설명한다. 하갈은 시내산이고 땅의 예루살렘이다. 율법을 받은 곳이고 율법이 다스리는 곳이며 구원이 완성되지 못한 곳이다. 이스마엘은 이곳에 있다. 그러나 사라는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구원이 완성된 곳이다. 이삭은 약속의 아들로서 이곳에 들어간다.

바울은 이렇게 하갈과 사라, 이스마엘과 이삭을 시내산(혹은 땅의 예루살렘)과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비교하며 구원은 율법이 아니라 약속으로 받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약속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복음이 옳다는 것이 증명된다. 우리가 이 비유적 설명을 신뢰할 때 이 설명은 쉽고 설득력 있는 논증이 된다.

2)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고 했다가 태어난 아들이다. 이스마엘은 약속을 이루지 못한다. 이삭은 믿음으로 기다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난 아들이다. 약속대로 태어나 약속을 이룬다.

이 모습도 율법주의와 복음주의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율법주의는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주의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으려는 것이다. 이스마엘과 이삭의 모습과 얼마나 비슷한가. 그래서 바울은 이스마엘과 이삭의 사건을 율법과 복음을 대조하는 비유라고 설명한 것이다.

더욱이 지금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미혹을 받고 있는데 이스마엘과 이삭 중에 누가 먼저 할례를 받았는가? 할례는 아브라함이 99세, 이스마엘이 13세, 이삭은 아직 태어나기 전에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이스마엘이 먼저 할례를 받았다. 물론 이삭도 나중에 할례를 받았지만 할례로는 이스마엘이 앞서는데도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이 유업을 받았다. 이것은 할례 받은 자가 아니라 약속의 아들이 유업을 받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니까 할례로 구원을 따지는 거짓교사들은 잘못된 것이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하갈이 잉태하자 사라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율법주의는 자기 업적을 의지하기 때문에 업적이 생기면 교만해지고 남을 무시하게 된다. 또 자기 업적을 위해 경쟁과 시기와 배척과 이간을 하게 된다. 복음주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악이 나타나지 않는다.

갈라디아의 거짓교사들을 보라. 이들이 바울을 참소하며 바울과 성도들을 이간하지 않는가? 우리는 이런 이간을 당해도 안 되고 이간을 해도 안 된다. 혹시라도 다른 교회 성도를 데려와서 내 업적을 쌓으려고 하면 안 된다. 다른 집 자녀에게 우리 집이 더 좋으니까 가족 버리고 우리 집에 오라고 할 수 있는가? 본문의 마지막 말씀을 보라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계집종의 아들인 율법주의는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한다. 바울은 이런 강력한 표현으로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토의문제

1. 성경을 예화나 비유로 설명해서 잘 알아듣고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2. 율법주의는 하갈이나 이스마엘과 같고 복음주의는 사라나 이삭과 같다는 말씀에서 어떤 느낌을 받으십니까?(비천, 고귀함, 불안, 평안, 등)
3. 율법주의에는 교만, 경쟁, 시기, 이간, 등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우리에게 업적 때문에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예를 한번 찾아보십시오.
4. 할례가 우선이 아니라면 모든 종교의식이나 외형이 우선이 아닙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선이 아닌 것을 찾아보십시오.(외형, 직분, 등)
5. 복음에 바로 서서 율법주의와 잘못된 경쟁에 빠지지 않도록,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바로 믿도록, 조원들의 기도 제목을 두고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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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아침빛님의 댓글

  • 아침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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