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과 바울과 바나바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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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덕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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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에서 느끼는 바울의 특징을 말씀해보십시오. 

    바울이 열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교회를 박해할 때도 열심이었고 예수님을 믿은 후에 복음을 전할 때도 열심이었습니다. 이런 특징은 결국 그로 하여금 반대자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게 했습니다.

2) 다메섹에는 바울 외에도 많은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에는 사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유독 바울만 죽이려고 했겠습니까? 

    몇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누구보다 더 열심히 전도하여 교회의 반대자들 눈에는 가장 골칫거리로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욱이 바울은 유능한 사람입니다. 성경도 많이 알고 헬라문화나 철학도 많이 알고 헬라어도 잘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전도가 많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특별히 더 박해를 받은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나중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볼 때 바울은 다른 유대인 신자들보다 더 복음의 핵심을 과격하게 전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로부터 더 많은 박해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전에 사도들보다 스데반이 더 많은 박해를 받고 순교한 것과 비슷합니다. 이 말은 이미 바울이 사도들 이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는 일꾼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3) 바울이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동안 묵상하며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과연 바울이 그랬을까요? 갈라디아서 1:15-19를 읽어보시고 거기 나오는 바울의 모습을 정리해보십시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 오일을 유할쌔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갈 1:15-19)

    이 본문은 바울이 삼년만에 예루살렘으로 갔다고 하는데 여기서 다메섹으로 돌아간지 3년만인지 회심한지 3년만인지는 불분명합니다. 만일 다메섹으로 돌아간지 3년만이라면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지냈다는 말은 아무 근거가 없는 말이 됩니다. 또한 회심한지 3년만이어도 그 3년 동안 바울은 다메섹-아라비아-다메섹 이렇게 옮겨가며 3년을 지낸 것으로서 아라비아에서만 3년을 지낸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여기서 말하는 아라비아가 아라비아 광야를 지칭한다는 근거도 없습니다. 당시에 아라비아는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아라비아 광야로 간 것이 아니라 아라비아 사람들의 거주지역으로 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믿자마자 바로 열심을 다해 복음을 전한 것으로 볼 때 바울은 전도를 위해 광야보다 거주지로 갔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이런 여러 가지 모습을 볼 때 바울이 광야에서 3년 동안 묵상했다는 말은 성경의 근거 없이 짐작으로 말한 것이 널리 퍼진 것 같습니다. 바울에게서 분명한 것은 열심을 다해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따로 광야생활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역하는 중에 주님으로부터 계속하여 계시를 받고 복음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4) 바울의 전도가 큰 영향력을 가진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바울의 특징을 생각해볼 때 그의 열정과 사랑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변화된 모습도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이고 아울러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그의 지식도 전도사역에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훈련시키신 것을 이렇게 이용하십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울에게도 성령님의 역사가 크게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5)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교회에 가입하려고 했을 때 어떤 상황이 발생했습니까?

   
예루살렘의 신자들이 바울의 회심을 믿지 못하여 그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자세는 답답한 모습이기도 하지만 쓸데없는 위험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과히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도 결국에는 바울의 회심을 믿고 바울을 받아들입니다.

6) 누가 바울을 위해 적극적으로 중재합니까?

   
바나바입니다.

7) 여기서 바나바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바나바에 대해 아는 것을 말씀해보십시오. 사도행전 4:36-37; 11:19-26; 15:36-41을 읽어보십시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 4:36-37)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19-2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행 15:36-41)

    이 말씀을 볼 때 바나바는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는데 특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주는 마음이 컸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을 믿어주고 또한 가입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11장에서는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로 파송될만큼 예루살렘 교회에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안디옥 교회가 부흥하자 유능한 바울을 데려와서 같이 목회를 합니다. 바울은 이미 그 영향력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박해의 표적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아마 자기보다 더 유능할지도 모르는 바울을 데려와서 동역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나중에는 바울이 바나바보다 앞서서 활동하기도 합니다. 바나바의 자세는 참으로 온유하고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또한 요한 마가에 대해서도 바나바는 용서하고 다시 기회를 주려고 합니다. 바나바는 이웃을 사랑하고 섬겨주는 귀한 종입니다.

8)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습니까?

   
동역자로 인정받고 마음껏 사역하게 됩니다. 또한 위험에 처하자 교회의 도움으로 피하게 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와 바울 사이에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의 갈등이 작지 않은 문제였는데 사도행전은 이방인 교회의 지도자가 된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와 화목하게 지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갈등을 해소하도록 도와줍니다.

9) 본문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특징을 생각해보시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을 찾아보십시오.

   
바울의 특징은 열정과 추진력이고 바나바의 특징은 온유와 이웃에 대한 배려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받고 예수님을 믿으면서 얼마나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지 생각해보시고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기도합시다. 또한 자기의 유익이나 명예보다 이웃의 유익을 배려할 줄 아는 바나바의 모습도 배우도록 노력합시다. 이 두 가지 특징 중에 경우에 따라 더 필요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어떤 일꾼이 더 필요한지 생각을 나누어보십시오. 또한 '나'는 어떤 모습에 가까운지 생각해보십시오. 둘 다를 겸비한 신앙인이 될 수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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