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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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덕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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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순 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이웃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뜻이 이웃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일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하나님 사랑 한 가지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가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도 사랑해야 한다.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에게 유익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지으며 이웃에게 덕을 끼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해야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원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순 되는 게 아니라 일치하는 것이다.

1. 악에 고통당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일치한다.
2. 악을 행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도 하나님 사랑과 일치한다. 악행을 돕는 게 아니라 회개의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이웃을 돕는 것은 이웃 사랑이 될 수 없다. 자녀가 죄를 지어 부모를 섬기면 자녀는 망하는데 부모에게 덕이 되는가? 악행으로 이웃을 도우면 그 악행에 징계가 임할 때 이웃에게 덕이 되는가?(장물로 돕는다?)
이렇게 하나님 사랑과 진정한 이웃 사랑은 상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시적으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부모가 굶주린 자녀를 위해 도둑질을 하는 것은 자녀 사랑을 위해 하나님 사랑을 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에게 일시적인 유익을 주려고(궁극적으로는 유익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려고 할 때가 많다.

바울이 지금 갈라디아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바울이 하나님께 좋게 하면 당연히 갈라디아교회에도 좋고 심지어 거짓교사들에게도 좋다. 이들 모두가 파멸의 길에서 벗어나 구원의 길을 가는 데 도움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인 모습이고 당장은 바울의 가르침이 거짓교사들과 갈라디아교회의 성도들에게 고통과 치욕을 줄 것이다. 그래서 일시적으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때 바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어길 것인가?

바울은 일시적으로라도 사람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어길 수 없다고 한다. 왜 그런가? 우선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실제로 사람에게도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기쁘게 해주려고 한다. 왜 그런가? 대체로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이 하나님께도 좋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언제 이렇게 오해하느냐 하면 온 인류에게 잘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그렇다. 이것은 인본주의적인 사고이다. 인본주의는 사람을 사랑하고 잘해주는 장점이 있으나 사람을 위해 하나님을 버리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종교를 존중하여 종교다원주의가 되거나 이웃에게 잘해주는 행동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율법주의가 된다.

2. 특정인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다른 사람의 입장이 난처해질까 봐 하나님의 뜻을 강하게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존 워너메이커는 백화점의 왕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나중에 우정장관도 지냈는데 독실한 신자이며 교회학교 교사였다. 한 번은 그가 섬기는 교회에 일본 손님이 방문하여 인사말 할 기회를 줬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데 나는 공자를 믿습니다. 예수나 공자나 다 같이 훌륭한 사람이니 여러분은 예수 잘 믿고 훌륭한 사람 되세요.” 인사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워너메이커가 강단에 올라와 예수님과 공자는 전혀 다르다고 가르쳤다. 베드로가 위선적인 행동을 할 때 바나바는 따라 하고 바울은 꾸짖었다.(갈 2:11-14)

3. 특정인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경우도 있고 동료를 두려워하여 그러는 경우도 있다. 일제시대의 신사참배는 대적자들이 두려워서 그런 것이다. 군사독재자 때문에 설교 주제가 제한되는 것도 이런 모습이다. 반면에 종교다원주의적인 신학자들이 많은 곳에서 그들 말에 동조하는 것은 동료들에게 왕따 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설교자들이 교우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씀을 전하지 못하는 것도 이런 모습이다. 성도들의 사회생활(가정생활)에도 이런 모습이 많을 것이다.

갈라디아의 거짓교사들이 할례를 받아야 온전한 구원에 이른다고 율법주의적인 말을 하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1) 율법주의의 영향으로 복음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유대인들의 박해를 면하기 위해서이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갈 5:11) 3)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미혹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자기 업적을 이루기 위해 율법주의적인 말을 한다.(면죄부 판매)

토의문제

1. 예배, 성경공부, 기도회에 빠진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그런 경우와 사람을 위해서 그런 경우를 구별할 수 있습니까?(본인 질병, 가족 간병, 친목회, 등)
2. 다른 사람들을 따라 했다가 후회한 적이 있습니까?(구매, 가입, 법 위반, 등)
3. 악한 방법으로 이웃을 도운 적이 있습니까?(이웃을 위한 거짓말, 부정선거, 등)
4. 모조품을 진품인 것처럼 속여 폭리를 취하는 성도가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그를 돕겠습니까?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해주십시오.
5. 우리가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며 순종하도록, 이웃의 잘못을 사랑과 지혜로 고쳐주도록, 교회의 부흥을 위해, 조원들의 기도제목을 두고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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