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과 주기도의 다섯 번째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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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덕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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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문: 주기도의 다섯 번째 기원에서 우리는 무엇을 구합니까?




답: 주기도의 다섯 번째 기원,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값없이 용서해주실 것을 비는데, 그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가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능히 용서하여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이것을 구할 담력을 가지게 됩니다.(엡 1:7; 마 6:14)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마 6:14)




1. 주기도에서 우리를 대상으로 드리는 두 번째 기원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것입니다. 이 기원에서 우리는 먼저 죄의 문제를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주기도에서 ‘죄’를 ‘빚’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가 아주 실제적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의 죄가 실제적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우리의 죄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보응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께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갚아야 할 빚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죄에 대한 보응은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빚을 갚지 않고도 유야무야 넘어가는 일은 없습니다. 당장 죄에 대한 보응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절대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이 차를 새로 바꾸려고 사용하던 차를 팔려고 했더니 그동안 밀린 범칙금이 자동차 값만큼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아예 차를 사는 사람에게서 자동차 값을 받지 않고 대신 범칙금을 내고 차를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범칙금이 그때그때 나오지 않았지만 그 차 앞으로 차곡차곡 쌓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보응도 이와 같이 반드시 우리에게 닥쳐옵니다.




둘째, 우리가 이웃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도 아주 실제적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을 용서해준다는 뜻입니다. 이웃이 우리에게 죄를 지은 것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해를 끼친 것이고 우리는 그에게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빚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웃을 용서해준다는 것은 이런 빚을 탕감해주는 것처럼 이웃의 죄를 용서해준다는 뜻입니다.




2. 이렇게 죄는 아주 실제적인 것인데도 우리는 죄를 추상적으로 생각하거나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모습 중에 하나가 죄를 객관적인 사실이나 실체가 아니라 주관적인 느낌이나 관념으로 보는 자세입니다. 죄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죄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대부분 실제로는 죄가 아닌데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이런 죄의식이 부모나 사회로부터 강요된 도덕관념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실제로는 그런 행동이 전혀 죄가 아니기 때문에 쓸데없는 죄감을 버리고 즐겁게 살라고 가르칩니다. 죄를 실제로 우리의 잘못이며 보응 받아야 할 무서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마음에 죄의식만 갖지 않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사탄에게 속아 넘어간 거짓교훈입니다.




3. 우리는 죄에 대해 두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죄감과 죄입니다. 죄감은 죄를 지었다는 의식과 그에 대한 자입니다. 죄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죄가 있고 벌을 받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죄를 지으면 죄감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어도 죄감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혼자 자기가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죄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 실수로 사고를 당했는데 나의 실수로 그런 줄 알고 죄감을 가지는 것이 이런 경우입니다. 죄는 있는데 죄감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악을 행하고도 그것이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실제로 죄를 지으면 아무리 자기가 죄감 없이 평안을 누려도 그 죄에 대한 벌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똑 같은 행동을 해도 죄감과 죄가 없는 경우가 있고, 죄감과 죄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상의 제물을 먹은 경우 믿음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먹은 사람은 둘 다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속으로 꺼림칙하게 생각하면서 먹으면 둘 다 있습니다. 이 사람의 행동은 믿음으로 하지 않은 것이므로 죄가 됩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동시에 자기가 옳지 않은 일을 했다는 죄감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면 그 행동 자체는 악이 아니라고 해도 그 사람은 죄를 지은 것입니다.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은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양심이 잘못되어 있으면 아무리 양심에 거리낌 없는 행동이라도 죄가 됩니다. 자기 마음에는 거리낌이 없어도 율법에 비춰볼 때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기준은 율법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요구가 채워지기 전에는 아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4. 죄가 이렇게 실제적인 것이고 철저히 보응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죄의 용서를 위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는 십자가의 사건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5. 그러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먼저 이웃을 용서해줘야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무엇을 해드린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롬 11:35)




혹시 이 말씀이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정도나 방법에 따라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신다는 뜻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행동은 하나님 행동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만일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것을 봐서 용서해주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용서를 받겠습니까?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두 빚진 자의 비유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왕이 자기에게 10,000달란트 빚진 종이 빚을 갚을 수 없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빚을 갚으라고 하다가 갚지 못하자 옥에 가둬버렸습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10,000달란트의 빚을 탕감해준 종을 불러 꾸짖습니다. 그리고 탕감해준 것을 취소합니다.




이 비유에서 10,000달란트 빚진 종은 이웃의 빚을 탕감해준 후에 자기 빚을 탕감 받는 게 아닙니다. 먼저 자기 빚을 탕감 받습니다. 다만 이렇게 자기 빚을 탕감 받았으면 이웃의 빚도 탕감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탕감 받은 게 취소됩니다. 왜 취소됩니까? 자기가 받은 은혜를 모르고 은혜 받은 사람답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받은 은혜를 모른다는 것은 은혜를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믿지 않았으니 엄격히 말하면 처음부터 용서받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용서받은 사람은 그 은혜를 알기 때문에 당연히 이웃을 용서합니다.




소요리문답은 이것을 “그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가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능히 용서하여줄 수 있기 때문에”라는 표현으로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6. 우리는 이웃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를 반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실제적인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이웃의 실제적인 죄를 용서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해를 끼쳤고 우리가 보상을 요구해도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죄를 용서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빚을 탕감해주는 것처럼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무서운 죄를 용서해주셨다면 우리도 이웃의 악독한 죄를 용서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7. 이웃의 죄를 얼마나 용서해줘야 합니까?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마 18:21-22) 이 말씀은 무한히 용서해줘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무한히 용서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용서를 중지하시면 우리는 파멸당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계속하여 이웃을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기도의 이 간구를 바꿔서 해보십시오.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겠사오니 우리의 죄를 사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이웃의 죄를 용서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8. 물론 주기도의 이 간구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믿고 용서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죄의 용서를 통해 구원과 사랑과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이 용서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두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주시겠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므로 용서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용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지속적으로 죄를 짓기에 계속적인 용서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은혜를 힘입어 이웃을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이웃을 용서해주겠다고 아뢰며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받은 용서가 진짜 용서가 되고 우리가 항상 용서의 축복 속에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토의문제




1. 과거의 어떤 죄에 대해 반복해서 죄감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혹시 지금도 생각할 때마다 죄감을 느끼는 것이 있습니까? 그래서 반복하여 그에 대해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까? 이런 경험을 말씀해주십시오.




2. 우리는 하나님께 한번 회개하여 용서받으면 완전히 용서받은 것입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 43:25) 용서의 확신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죄감과 용서의 확신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용서의 확신과 평화로운 삶을 위해 서로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3. 죄의 벌과 죄감 중에 ‘나’에게 더 큰 고통을 주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달리 말하면 용서받았는데도 죄의식으로 고민하는 것과 용서받지 못해 실제로 벌을 받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나에게는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4. 용서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같습니다. 이 은혜에 대한 감사가 가장 컸던 경험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5. 내가 용서하기 어려운 이웃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며 어떤 죄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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