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과 죄와 보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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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덕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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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문: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답: 타락한 후에 사람은 이생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으며 생각과 말과 행위로 날마다 그 계명을 범합니다.(전 7:20; 창 8:21; 약 3:8)


제83문: 법을 범한 모든 죄가 똑같이 악합니까?

답: 어떤 죄는 본질적으로 또 여러 가지 악화요인들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다른 죄보다 더 악합니다.(요 19:11)


제84문: 모든 죄가 마땅히 받을 보응은 무엇입니까?

답: 모든 죄가 마땅히 받을 보응은 이생과 내세에서 받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입니다.(갈 3:10; 마 25:41)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 7:20)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1.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죄의 용서를 받아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도 이생에 살 동안은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온갖 고통을 겪으며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을 완성하실 때 우리의 이 몸을 폐하시고 새로운 영광의 몸을 주시며 이 세상도 폐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2-44)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2. 물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생에 있는 동안은 죄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이렇게 우리는 주님을 믿어도 아직 연약한 모습이 남아있어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죄 때문에 좌절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용서받고 평화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우리가 평화를 누리는 것은 죄를 짓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정죄를 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지을 때 슬퍼하나 주님의 은혜로 정죄당하지 않기 때문에 위로받고 새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다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면서 죄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3. 바른 신앙을 방해하는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 주장은 율법주의와 방탕주의일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율법주의를 무너뜨립니다. 왜냐하면 율법주의는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으려는 것인데 사람이 죄를 짓는다는 것은 사람이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고 늘 주님을 의지하는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방탕주의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어차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데다가 예수님이 우리 대신 율법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방탕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이 방탕주의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영혼과 육체를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이 주장은 영혼은 예수님의 은혜로 깨끗해졌고 육체는 워낙 약하고 추해서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영혼과 육체가 구분되므로 육체의 추함이 영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죄를 지어도 영혼이 구원을 받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과 육체가 결합된 사람입니다. 이 둘 중에 하나만으로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육체가 죄를 짓는 것은 영혼이 시켜서 짓는 것입니다. 심지어 육체는 움직이지 않고 영혼의 생각과 뜻만으로도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육체가 죄를 지어도 영혼은 깨끗하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죄를 짓지만 이미 죄를 용서받았고 싫어합니다. 그래서 죄 짓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거나 심지어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율법을 폐기하고 방탕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17-20)


4. 그러면 바른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선 최선을 다해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가 하나님 뜻대로 삶으로써 구원을 얻으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이 구원해주신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헌신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노력해도 연약한 본성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고백하며 더욱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됩니다. 신자는 죄를 지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가 죄를 지으면 더욱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앞으로 죄에서 멀어지려고 더욱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우리가 짓는 죄에는 경중이 있습니다. 구약에도 보면 하나님은 죄에 따라 다른 벌을 내리십니다.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신 19:21) 신약에도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요일 5:16-17) 여기서 사망에 이르는 죄는 요한일서가 강조하는 대로 예수님을 부인하는 죄일 것입니다. 또 같은 형태의 죄라도 사람의 형편에 따라 경중이 달라집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7-48)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죄를 자백하고 회개할 때 더 깊은 슬픔을 느끼는 죄도 있는 것입니다. 아마 신앙이 좋은 사람일수록 더 큰 슬픔으로 회개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감사와 기쁨도 더 클 것입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주님의 은혜도 더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6. 신자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외아들 예수님을 죽게 하셨으니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령님의 감동 속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른 삶이 얼마나 수준이 높은지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산상설교를 읽으면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바른 삶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입을수록 과거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것이 죄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분은 신앙의 성장은 영적 시력을 강화시켜주는데 이렇게 되면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더 많은 죄를 보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점점 성능이 좋은 돋보기를 가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성장하면 새롭게 회개할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훌륭한 신앙인일수록 더욱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7. 우리가 죄를 ‘하나님의 뜻에 못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인본주의적인 생각에 젖어버린 사람들은 죄인지 아닌지의 기준을 하나님의 뜻에 두지 않고 사람의 판단에 두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사람의 판단을 기준으로 삼으면 무엇이 죄겠습니까? 사람에게 해가 되는 게 죄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사람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종교의 신과 하나님을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 사람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야 종교인들이 서로 존중하며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불신자가 많아 세상도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십계명의 제1계명을 어기는 게 선이고 지키는 게 악이 됩니다.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죄를 판단하는 표준을 하나님의 뜻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성경을 통해 주어졌다는 것을 믿는 것도 중요합니다. 인본주의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각자의 양심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인간의 뜻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8.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는 우리의 삶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초신자는 아직 삶으로 판단할 수 없겠지만 오래 믿은 사람들은 삶을 통해 그의 믿음을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행위만 있으면 믿음도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불신자들 중에도 신자보다 더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있을 때 그 믿음의 정도는 자연스럽게 행위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신자들의 행위를 믿음의 중요한 척도로 보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 7:16)


그런데 세상 사람들도 신자들의 행위를 보고 믿음을 판단합니다. 심지어 세상 사람들은 행위를 보고 종교자체를 판단합니다. 어떤 종교인들에게 악행이 많으면 그 종교의 가치를 무시합니다. 그리고 그 종교의 가르침도 무시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세상에서 바르게 살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게 되고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계명에 따라 사는 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만이 아니라 이웃의 구원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9. 우리가 십계명을 배울 때 마음에 부담이 생긴 것은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부담이 두 가지 모습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십계명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혹시 지키지 못했을 때는 겸손히 회개하며 주님의 은혜를 더욱 의지하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더욱 계명을 잘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토의문제


1. ‘내’가 정말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습니까? 언제 어떤 경험을 통해서 그렇게 깨달았습니까?


2. ‘나’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까? 그 평안을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또 십자가를 보며 죄를 멀리해야겠다고 결단할 때도 있습니까? 십자가를 보고 특별한 느낌을 가졌던 경험을 나눠주십시오.


3. ‘나’는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의 벌을 받을까봐 두려워합니까? ‘나’는 현세의 벌과 내세의 벌 중에 어느 것을 더 무서워합니까?


4. 나는 ‘율법주의’와 ‘방탕주의’ 중에 어느 쪽에 더 빠지기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교회는 전체적으로 볼 때 어느 쪽에 빠질 위험이 더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5. 세상 사람들은 종교인들의 삶을 보고 종교의 가치를 평가합니다. 여기서 기독교가 좋은 평가를 얻기 위해 한국교회가 고쳐야 할 구체적인 모습을 5 가지 찾아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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