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과 제6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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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덕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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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문: 제6계명이 무엇입니까?

답: 제6계명은 “살인하지 말찌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출 20:13)


제68문: 제6계명에서 명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6계명에서 명하는 것은 모든 합리적인 노력으로 우리 자신의 생명과 남의 생명을 보존하라는 것입니다.(엡 5:28; 잠 24:11)


제69문: 제6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6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불의하게 우리 자신의 생명이나 이웃의 생명을 빼앗거나 해치는 일들입니다.(행 16:28; 창 9:6)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치 말라.”(잠 24:11)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 9:6)


1. 제6계명을 바로 이해하려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은 큰 죄가 됩니다. 그러나 다른 피조물은 죽여도 살인과 같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홍수 전에는 식물만 사람의 음식이었으나 홍수 후에는 동물까지 사람의 음식으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창 1:29)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 9:3)


동물을 죽이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잘 관리해야 하는 의무 중에는 동물을 잘 관리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물을 죽인 것과 사람을 죽인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소는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인하여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므로 남녀간에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 죽일 것이고 임자도 죽일 것이며 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명하면 무릇 그 명한 것을 생명의 속으로 낼 것이요.”(출 21:29-30) “이 사람의 소가 저 사람의 소를 받아 죽이면 산 소를 팔아 그 값을 반분하고 죽은 것도 반분하려니와 그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는 줄을 알고도 그 임자가 단속하지 아니하였으면 그는 소로 소를 갚을 것이요 죽은 것은 그의 차지가 될찌니라.”(출 21:35-3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 9:6)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특별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경 파괴를 문제 삼는 것도 환경 자체의 파괴보다 그것으로 인해 사람에게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입니다. 환경운동가들이 환경과 사람의 관계를 무시하고 환경 자체에 절대가치를 두는 것은 올바른 판단기준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모든 환경이 인간의 삶과 관계가 있으니 이 둘을 완전히 분리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환경보존을 위한 판단의 원리는 환경 자체보다 사람의 유익(장기적이고 널리 보면서)에 더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모두 살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정당방위로서 살인이 아닙니다.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출 22:2-3상) 낮에 도둑을 죽이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은 밤만큼 위험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정당방위에 대해서만 사람을 죽여도 살인죄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는 개인 사이만이 아니라 공동체 사이에도 해당됩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 침략을 받은 나라는 자기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싸울 수 있고 대적을 죽일 수 있습니다. 이것도 당연히 정당방위입니다. 그러므로 군에 가는 것을 거부하거나 집총을 거부하는 것은 성경을 바로 이해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롬 13:4-5) 관원들이 선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백성 중에 악인을 벌하는 것만이 아니라 외국의 침략을 막는 것도 포함합니다. 오히려 더 큰 사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나라의 법을 집행하는 관리의 명에 따르는 것은 우리의 정당한 의무입니다.


오히려 살인하지 않기 위해 침략자를 대적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기 나라 백성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살인을 하지 않겠다고 무기를 들지 않으면 오히려 진짜 살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인을 막을 임이 있고 또 막을 수 있는데도 내버려둬서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파숫군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하므로 그 중에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바 되려니와 그 죄를 내가 파숫군의 손에서 찾으리라.”(겔 33:6)


3. 사형제도는 다소 어려운 내용을 안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성경에는 사형제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이러한 죄를 지은 자는 죽이라고 명령하시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사형은 살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형은 살인에 익숙해져서 다시 살인할 위험이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세우신 국가의 제도에 의해 죽임으로써 살인을 막으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형은 그 사람이 다시 사람을 죽일 위험만 제거하는 게 아니라 사회에서 살인을 줄어들게 만드는 효과도 있을 것입니다. 사형은 제도에 의한 일종의 정당방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시면서 사랑과 관용으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신만을 보자면 사형을 시키지 말고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게 더 좋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원해서 지키도록 가르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교훈은 법으로 만들기 어렵습니다. 법은 강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의 교훈은 우리 모두가 목표로 삼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할 방법입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교훈을 사회의 법으로 만들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2)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법으로 만들면 사회가 유지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상만 가지고 사형제도를 폐지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4. 살인금지 계명의 정신은 사람의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성냥으로 장난을 하거나 칼로 장난을 하면 그와 이웃의 안전을 위해 그것을 막아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해야 할 행동입니다.


이런 노력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쾌락을 위해 목숨을 겁니다. 일부러 위험한 운동을 즐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판단의 기준이 다소 애매하기는 하지만 분명한 위험에 자기를 노출하는 운동은 죄입니다. 진정한 등산가는 안전을 고려하며 등산을 하지 위험할 때 무모하게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무모한 내기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철교에서 늦게 뛰어내리는 시합 같은 것이 이런 것입니다. 혹은 지병으로 인해 자기 몸에 해로운 줄 알면서 쾌락을 위해 술, 담배, 고기 등을 절제하지 않는 것도 비슷한 것입니다.


다만 음식 문제에 대해 조심해야 할 것은 특정한 음식을 단순히 구약의 정결법처럼 금하는 것은 성경의 교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정한 음식을 부정한 것처럼 취급하거나 금욕을 강요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막 7:18-19)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 14:14) 그래서 우리가 음식을 절제하는 것은 자기의 건강이나 경건한 시간을 위해 혹은 그 음식을 속되게 여기는 이웃의 신앙생활에 유익을 끼치기 위해 그러는 것입니다. 다만 남용은 우리 자신에게도 해롭고 더욱이 어려운 사람이 많은 세상에서 남용은 이웃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에 게으르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피해야 합니다.


5. 예수님은 살인금지 계명을 완성시키시며 살인의 동기가 되는 마음의 문제와 인격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문제까지 다루셨습니다. 사람에게 화내는 것은 그를 해칠 위험을 품는 것이므로 피해야 합니다. 악한 말로 해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22) 우리는 이웃의 생명에 해를 끼치지 말고 오히려 유익을 줘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웃과 사랑하며 화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인금지 계명의 완성을 위해 화목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6.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는 이생에서의 살인과 해를 끼치는 일에 대해서만 주로 가르쳐주셨지만 결국 사람의 생명은 이생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영생으로 이어집니다. 만일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어 그의 신앙생활을 막는다면 현세의 살인보다 더 큰 살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신앙생활에 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아직 영생의 길로 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의 생명을 진정으로 보호하려면 그를 영생의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었고 나중에 제자들에게도 가장 중요하게 명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제6계명을 지키기 위해 이웃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가 구원의 길을 가도록 돕는 일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토의문제


1. ‘나’는 죽고 싶은 적이 있습니까? 어떨 때 그런 느낌을 가집니까?


2. ‘내’가 재판관이라면 어떤 사람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싶겠습니까? 특정인을 지칭하지 말고 직분이나 행위로 표현해주시기 바랍니다. 예: 북한의 동포를 억압하는 사람, 어린이를 상습적으로 학대하는 사람, 등.


3.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무시하는 잘못된 모습을 3-5가지 찾아보십시오.


4. 다른 사람의 생명을 무시하는 사회의 잘못된 모습을 3-5가지 찾아보십시오.


5. ‘내’가 이웃의 정신적, 영적 생명을 보양한 경험과 해친 경험을 나눠주십시오. 이웃에는 가족도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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