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과 박해를 이기는 교회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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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덕호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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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과에서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에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두 사도가 지체장애인을 고치고 그것을 계기로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습니다. 본문은 거기서 풀려 나와서 한 일이 기록된 것입니다.

2) 두 사도는 풀려 나오자 어떤 행동을 합니까? 이 행동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먼저 온 교회에 자기들이 당한 일을 고합니다. 교회를 존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두 사도는 지도자들이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사실을 고하여 모두가 교회의 형편을 알고 함께 기도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3) 두 사도의 보고를 들은 교회는 어떤 행동을 합니까?

    일심으로 소리를 높여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교회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한 것은 온 교회가 그 어려움을 공감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4) 교회의 기도 내용을 정리해보십시오.

가) 하나님을 어떻게 부릅니까?

    하나님을 "대주재"라고 부릅니다. 이 칭호는 하나님이 세상을 정의로 다스리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교회를 핍박하는 악에 대해서 정의로 심판하실 것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나)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묘사합니까? 두 가지 모습을 찾아보십시오.

    천지를 지으신 분이라고 묘사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어 교회를 지켜주실 분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시편을 인용하며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이미 세상의 군왕들이 하나님과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리라는 것을 예언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지금 정치권력들이 교회를 박해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 속에 진행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다)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고 묘사하는 것이 교회의 상황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하나님의 권능을 확신하는 것은 박해 중에 있는 교회에 큰 힘이 됩니다. 더욱이 지금의 박해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진행되는 것이라는 말씀은 박해를 받고 있는 교회에 큰 위로가 됩니다. 이런 박해가 이미 하나님의 섭리 속에 예정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주재로 부르는 모습과 하나님이 천지를 주관하신다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라)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합니까?

    크게 두 가지를 간구합니다. 첫째,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달라는 것과; 둘째, 예수의 이름으로 병도 고치고 기적을 행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5) 하나님께 간구한 것과 지난 과에서 대제사장들이 사도들을 힐난할 수 없었던 세 가지 이유를 비교해보십시오.

    대제사장들이 사도들을 힐난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담대하게(기탄없이) 말한 것과, 예수의 제자였던 사실과, 병 나은 사람이 함께 있었던 사실입니다. 교회의 간구도 담대하게 말하게 해달라는 것과,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자신들이 예수의 제자임을 드러나게 해달라는 내용과 기적을 통해 복음의 역사에 증거가 있게 해달라는 내용이 다 포함됩니다. 결국 지금 교회의 기도는 앞에서 사도들이 보여준 위대한 증거와 같은 모습입니다.

6) 기도의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모인 곳이 진동하며 모두 성령이 충만해져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이 다시 충만해지는 모습을 보며 성령의 충만은 반복해서 일어나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새롭게 새롭게 성려의 충만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을 입어야만 능력을 받고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7) 박해 후 교회의 모습이 박해 전과 어떻게 다른지 말씀해보십시오.

    박해 전 교회의 모습은 사도행전 2:42-47에 요약되어 있고 박해 후 교회의 모습은 사도행전 4:32-35에 요약되어 있는데 두 모습은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이것은 박해가 교회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8) 당시 사회에는 궁핍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핍절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평화(샬롬)의 모습과 비교해보십시오.

    평화라는 말은 원래 전체가 다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평화로우려면 구성원 중 한 사람도 핍절하거나 소외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교회는 평화로운 교회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바로 이런 평화를 이루는 것이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성도의 교제가 잘 이루어졌습니다.

9) 초대교회가 이렇게 집이나 밭을 팔아 그 값을 헌금하고 그것을 나눔으로써 교회에 핍절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름다운 사랑의 분배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점은 없습니까?

가) 이런 생활을 얼마 동안이나 계속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몇 년 혹은 길어야 몇십 년밖에 계속하지 못할 것입니다. 재산이 다 떨어질 테니까요.

나) 초대교회는 왜 이런 생활을 했을까요?

    예수님이 곧 오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굳이 집이나 밭을 가지고 생산에 힘을 쏟아야 할 필요를 별로 못 느꼈을 것입니다.

다) 오늘의 교회가 여기에 보완을 한다면 무엇으로 보완해야 할까요?

    오늘의 교회도 이런 사랑의 분배를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생산을 무시하고 소비만 하며 분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분배 모습은 성실하고도 적절한 생산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10) 밭을 팔아 값을 바치는 사람 중에 요셉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의 별명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이 사람의 성품을 유추해보십시오.

    바나바입니다. 그의 성품은 남을 도와주고 위로해주는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나오는 바나바의 모습을 이해하고 바나바의 모범을 배우는 데 유익합니다.

11)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중보의 기도를 부탁할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교회의 어려움을 온 성도와 나누고 함께 기도합니까? 한 성도의 어려움을 다 같이 나누고 함께 기도합니까?

12) 우리 교회는 이 세 가지 모습을 얻기 위해 기도합니까?

13) 우리 교회에는 핍절한 사람이나 소외된 사람이 없습니까?

14)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분배할 뿐 아니라 생산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의 균형을 잡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성실한 생산과 사랑의 분배를 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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